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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04.20 부활의 첫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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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4-20

본문

부활의 첫 증인 요20:11-18. 2025. 4/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극복이요, 바로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부활의 기쁨과 승리로 넉넉히 이기며 사시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할렐루야!!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한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막달라 마리아는 모래와 같은 생명을 머금치 못하는 황량한 사막과 같은 심령을 지니고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눅 8:2절에 이렇게 소개됩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마리아라 하는 이일곱은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그 말은 곧 그녀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귀신 들려 고통당하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되고,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자기의 몸을 파는 창녀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기 전에는 절망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귀신들렸다고 판정받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회에서 격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부정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한 마디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천하다고 여기거나 멸시하지 않으시고 그를 지배하던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창녀였던 자신이 주님을 만남으로 그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주의 은혜 앞에 섰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활 사건이 일어난 정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되고 난 후 무덤에서 사흘 동안 계시다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4복음서에는 여인들이 먼저 무덤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결정적인 순간에 여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만 언급됩니다.
 
11절에 보면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라고 하는데 거기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질 않습니다. 여기 그곳에서 마리아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울다'는 동사 klaio는 단순히 울먹이거나 혹은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 간장이 끊어지듯 애곡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애곡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아직까지 거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다는 창녀였기에 남편도, 자식도, 번듯한 친구 한 명도 없었을 그 가련한 여인이 울부짖는 애곡 소리는 얼마나 애절합니까? 마리아는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님이 죽은 사실에 절망한 데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고 망연자실한 것입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너무나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졌던 희망과 기대를 상실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죽음은 어떤 희망도 사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그런 기대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특히 죽음은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사랑하던 가족이 병에 걸렸거나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죽음은 참 무자비합니다.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류에게 가장 무섭고 잔인하고 강력한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문 11절에 마리아의 모습은 오늘날 죽음 앞에선 인간의 모습입니다. 죽음 앞에서 항거할 수 없고,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절망하며 울 수밖에 없는 모습은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울고 울어도 끝이 나지 않는 절망만 있는 것입니다.
 

 
. 빈무덤 앞에서
 
그런데 13절에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들이 말을 겁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내 주님을 누가 어디로 옮겨다 놓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예수가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무덤의 문을 열고 나왔지만, 마리아의 눈은 아직도 닫혀 있었습니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무덤만 바라보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예수를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는 급반전이 일어납니다.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예수인지를 알아보지를 못했지만, 그때 예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리아에게 말을 거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20:15)” 이 말은 마리아야 내가 여기에 있는데 누구를 찾느냐, 이제 울지 말고 나를 보아라.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따뜻하게 부르시고,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정감이 넘치는 장면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마리아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이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서신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십자가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기셨던 그 그리스도가 부활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의 눈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야 왜 우니? 이제 울지 마. 이제 울지 않아도 돼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은 오늘 죽음의 권세 앞에 눌려있는 우리를 향해 들려주시는 음성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 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이름을 아시고 사정을 아시고 처지를 아시며 우리를 향해서 오늘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고 계시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10:27절에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의 죽음 앞에 이별의 아픔은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계14:13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의 출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승리가 됩니다.
 

전 이대 총장인 김활란 박사는 자신이 죽을 때 장송곡 대신 헨델의 메시아를 부르고, 검은색 옷 대신 파티복을 입고 와서 천국으로 보내는 환송식을 해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죽음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축복이 부활의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절망과 탄식, 애곡소리가 가득했던 인류에게 주님은 마리아에게 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왜 우니? 이제 그만 울어도 돼. 내가 다시 살아났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영광을 오늘 부활절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더 이상 애곡하지 않고 죽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신 사건 앞에서 기뻐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맞은 우리는 부활의 주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예배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금식도 하고, 조용하게 보내다가 부활절에만 반짝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영원히 부활의 주와 함께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정말 기뻐하고 기뻐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기뻐하느냐고 묻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하고 감격에 빠져야 합니다. 축제입니다. 부활은 모든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고 절대 절망을 절대 희망으로 바꿉니다. 이 부활의 사건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울하고 침통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삶의 중심에 놓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신나야 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주와 함께 기뻐하고 회복되는 역사가 주일마다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사건은 바로 죽음을 통과한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모든 것이 꽉 막혀 질식할 것 같고, 해답이 전혀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일으키신 주님과 함께 부활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디베랴 호숫가로 떠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숯불을 피워놓고 조반을 주시며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비로소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11:25-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오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어도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지면 비굴한 삶을 살지 않고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은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펄펄 살아나는 힘이 생깁니다.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1세기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 박해가 심했습니다. 원형 경기장 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몰아넣어 굶주린 사자에게 뜯기고 먹히는 장면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들이 경악합니다. 살려달라고 발악을 해야 즐길 수 있는데 죽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메시지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환란 가운데에서도 기뻐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힘은 부활에 있습니다.
 
 
. 또한, 이 부활은 알려야 합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가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외칩니다. 부활을 목격한 순간부터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은 인류 역사 최대의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을 마음껏 기뻐할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이 부활의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이제 울지 말고 즐거워하라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절망하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주신 부활의 복음, 이 소망을 알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미래에 대한 염려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현실 앞에 믿음을 가진 우리 역시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무덤에 갇힌 자들처럼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부활하신 예수를 담대히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 찾아와 희망으로 바꿔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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