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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새시대를 향하여(11)- 우리의 승리는 세상과 다른 승리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10-08 | 조회: 205

새 시대를 향하여  우리의 승리는 세상과 다른 승리입니다.  5:33-42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이 결실의 계절, 첫주 예배를 하나님 앞에 나와 찬양과 경배로 영광 올려 드림을 감사드립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사람의 혈관을 길이로 말하면 어느 정도 될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자그마치 120,000km가 됩니다. 지구 둘레가 40,008km이니까 혈관의 길이는 지구를 세 바퀴 돌 수 있는 길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세혈관이 그렇게 길고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120,000km나 되는 긴 혈관을 따라 피가 한번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46초면 됩니다. 그리고 한 쪽 모세혈관이 막히면 몸 안에서 또 다른 모세혈관을 만들어 내서 피가 돌도록 유도합니다. 마치 사고로 인해 교통체증이 일어나면 즉시 경찰이 출동하여 우회 길을 내므로 교통체증을 완화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 몸에는 사고가 났을 시, 혹은 비상시를 대비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심장입니다. 심장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기 중의 하나입니다. 하루에 10 3689번을 뛰고, 피를 펌프질해서 온몸으로 순환시킵니다. 피 안에 산소와 영양분을 담아 온몸의 세포에 공급합니다. 그리고 몸 구석구석에 있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노폐물을 운반해서 제거합니다. 게다가 피의 순환을 통해서 온 몸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합니다. 이 심장은 평생 쉬지 않고 작동합니다. 만일 80년 정도 산다면 평생 약 30억 번 뛴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심장이 영구적으로 정지하는 것을 사망의 법적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장이 뛴다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장이 정지하는 것이 곧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심장과 같은 역할은 바로 전도입니다. 내가 전도합니까?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전도 안합니까? 그것은 내가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복음 전하는 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하는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시련의 폭풍우가 몰아치다. 33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을 제거하고 거룩한 교회가 됨으로 계속 부흥과 성장을 거듭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거룩성을 회복하고 더욱 부흥하기 시작할 때 악한 마귀는 그것을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당국자들을 충동질하여 사도들을 다시 잡아 옥에 가두고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3절에 보면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을 하던 중에 사두개인들이 가장 분개했습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얼마나 분노했는지 사도들을 다 죽이자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죽였는데 그 제자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공 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두개인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다수파에 속하는 것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죽일 결심을 했다면 얼마든지 사형선고를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분개한 것은 특히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활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중점적으로 전했습니다. 둘째는 성전의 관할권자로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을 무시하고 성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집회를 하고. 병자들을 고쳐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두개인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을 예수를 죽인 당사자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무죄하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였다고 전파했습니다. 넷째로, 그들이 일차로 공회 명령으로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전히 예수를 전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공회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튼지 사두개인들의 생각대로 한다면 사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 뻔했습니다. 없이 하자는 말은 “ajnairevw”(아나이레오)인데, 제거하다, 혹은 죽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인다면 추종자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최초, 최대의 위기 상황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여기에 누가 나옵니까?

 

 

. 가말리엘의 등장 34-35

사도들의 생명이 위기에 처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말리엘이 일어났습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유대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최고의 율법 학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 유대교에 해 있던 시절, 그의 율법 스승이 가말리엘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은 살기등등한 공회의 분위기를 일순간 바꿔놓았습니다. 심문받던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판결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35절에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여기 조심하라!”는주의하라, 집중하라는 신중히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가말리엘은 예수님 편도 아니고 사도들 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자.’고 제안하고, 상당히 영향력이 있던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풀어줍니다.

 

 

가말리엘은 두 가지 사례들을 이야기합니다.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사건입니다. 드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는 마술사였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요단강 가에 불러 놓고 강이 갈라지게 하고 무리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허풍을 떨다가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AD44-46)가 보낸 기마병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또 유다는 가말라 유다라고도 하고, 갈릴리 유다라고도 했습니다. 가말라는 골란 지역의 한 지명입니다. 주후 6년 유대는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시리아 지역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와서 과세를 하기 위해 호적 등록을 시켰습니다. 이 때에 유다가 일어나 하나님 백성은 오직 여호와께 재물을 바칠 것이지 이방 통치자에게 바칠 수 없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유다는 곧 처형되었지, 그를 이어 열심당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미미했습니다.

이 두가지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서슬퍼런 공회원들에게 가말리엘이 외칩니다. 38-39절에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무슨 말입니까? 사도들이 하는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우리의 구원자라면 이 진리를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지리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을 상관 말고 내버려 두라! 하늘이 냈으면 흥할 것이고, 인간이 냈으면 망할 것이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을 대적 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참고 기다려 보자.’고 제안하고, 상당히 영향력이 있던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풀어줍니다.

 

 

오늘 가말리엘의 현명한 판단 가운데 풀려났지만, 그냥 풀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40절에 나온 것처럼 그들은 사도들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채찍질을 했다는 의미 원래 가죽을 벗기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채찍에 맞은 사람은 살가죽이 벗겨지고, 심한 채찍에 맞으면 뼈까지 드러날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채찍질을 한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 이 승리는 세상과 다른 승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41

41절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을 받았다는 것에 기뻐했습니다. 여기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은 자격을 갖추었다’ ‘특권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위협을 당하면서 이제 우리도 진짜 예수의 제자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채찍질을 당하고 능욕을 받았다는 사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자격,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고난과 협박 가운데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더욱 복음에 대한 열망이 타오른 것입니다.

 

 

복싱경기를 보면 선수가 넘어지는 경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운이고, 다른 하나는 KO입니다. 다운은 미끄러져 넘어지는 슬립다운이 있고, 펀치를 맞아서 넘어지는 다운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운당한 선수는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심판이 볼 때 다시 경기할 수 있다고 판단돼서 경기가 재개됩니다. 그러나 KO를 당한 선수는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일어난다고 해도 심판이 볼 때 다시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경기가 바로 종료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살면서 다운당할 수는 있지만 결코 KO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도 넘어집니다. 때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낙심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계획하고 추진해 오던 일들이 무산되고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조금만 강한 힘이 밀려오면 깨어집니다. 누군가가 작은 힘으로 밀어도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기도 하고, 작은 고난 앞에서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참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후 4:7-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보세요. 우리는 질그릇 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연약하여 쓸모없는 존재라고 치부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보배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똑같은 질그릇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똑같이 도공에 의해서 빚어진 질그릇이고 똑같은 온도에 구워진 도자기라 하더라도, 거기에 우리가 먹을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거기에 강아지 밥을 담으면 개밥그릇이 됩니다. 똑같은 질그릇이요 도자기라 하더라도 거기에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지만, 거기에 보배를 담으면 그것은 보배합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질그릇과도 같은 우리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담고 있기에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에 우리가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담고 있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자기 스스로 그 존귀함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존귀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몇백만 원짜리 명품백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시장바구니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명품백의 가치는 그냥 시장바구니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안고 살기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 자신을 비천하고 볼품없는 존재처럼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크신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 삼아주시고, 하늘나라 백성답게 세상의 그 어떤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기에, 우리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나는 실패자야. 나는 비천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분명 우리의 승리는 세상과 다른 승리 입니다. -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초대 교인들은 죽음 직전까지 왔음에도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42절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멘 더욱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 생명을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다시 심장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피는 정맥을 타고 심장으로 모입니다. 모여서 산소를 공급받고 새로운 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동맥을 타고 온 몸으로 흩어집니다. 온 몸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여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리스도인, 바로 저와 여러분은  피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를 공급받고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전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입술을 열어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에 힘쓰십시오. 우리 인생 사명 가운데 이루어야 할 사명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소유나 학식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주님의 증인 된 삶을 살았느냐?'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 동성교회가 주의 이름의 증인을 많이 양성하고 훈련하고 진리로 무장시키는 아름다운 증인이 많은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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