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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우리 인생의 현주소 (사41:1-4) [새생명축제]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10-16 | 조회: 246

 

오늘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걸음이 인생의 가장 값진 걸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가족의 권유로, 친구 또는 이웃의 전도로 여기까지 오셨지만, 이 분위기가 아주 낯설게 여겨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 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요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코로나가 일어나기 전에 우리나라에도 여러차례 오신 '이네노 다쓰히'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현재 일본에서 요도바시 교회를 담임하시는데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1000명이 넘는 성도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영성과 또한 지성을 겸비한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그런 분이였지만, 그가 쓴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책을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있는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 그의 가슴 안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에 가득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낮과 밤이 다른 이중인격자였답니다. 낮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가까이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였고 직장 동료들한테 언제나 신뢰와 인정을 한 몸에 받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유능하고 점잖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집에 들어올 때면, 술에 취해 아무 여자나 데리고 들어와 어머니와 자식 앞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온갖 추한 해동을 저질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져, 어머니는 그 앞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자신도 괴물처럼 변해버린 아버지를 피해 벽장 속에 숨어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런 시절을 보낸 그에겐 오직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뿐이었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자란 자신이 목사가 되어 하나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고"는 표현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네노 다쓰히' 목사님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오직 하나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분의 겉모습만 봐가지고, 그런 고통과 상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옆문을 열고 그 뒷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그도 진한 고통과 아픔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자식 때문에 우리에게 탄식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생활 때문에 오는 부부간의 상처가 있지 않습니까? 또 질병 때문에 그 고통으로 그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죄 때문에 받은 상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3년동안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 인구 가운데 6억이 넘는 분들이 코로나 확진으로 고생을 했고 그 가운데 65십만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 여파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며 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우리들을 향해 3절에 너희는 '상한 갈대, 꺼져 가는 등불'이라고 말합니다. 상한 갈대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갈대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식물이었습니다. 먹을 수도 없고, 팔 수도 없는, 쓸모없는 식물입니다. 멀리서 보면 갈대가 멋있게 꼿꼿하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목이 벌레를 먹어 상해 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지 않아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잔잔한 바람에도 곧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의 모습입니다.

 

또 꺼져 가는 등불은 어떠합니까? 등불에 기름이 없으면 불이 꺼져가지요. 그런데 기름이 없다고 금방 꺼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름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심지가 타들어 갑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등불은 방안을 밝혀두기 위해 걸어두는 것인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심지가 타들어 가면서 연기만 나서 온 방안에 가득합니다. 냄새나고 눈을 아프게 합니다. 이게 바로 꺼져 가는 등불입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을 향해서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의 한 심지와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현 주소입니다. 이와같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은

 

1.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부터 700년 전에 이 땅에 우리를 회복케 하실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시면 오실 그분은 외치지 아니하며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시끄럽게 소리치지 아니하며라는 뜻이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특히 고함을 지르면서 말싸움을 하지 아니하며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대적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결코 스스로 흥분하거나 그들과 맞서 싸움을 걸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장면은 요즘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일입니다. 보세요. 요즘 자기 PR 시대가 아닙니까? 요즘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SNS에서의 인지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스타그램팔로워의 숫자가 오르내리는 것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고, 무슨 사건이 발생하여 자기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1위로 오르게 되면 뛸 듯이 기뻐합니다. 심지어 무플보다는 악플이 더 낫다.’라는 말까지 흔히 합니다. 자기에 관한 인터넷 기사에 아무 댓글이 달리지 않는 것은 곧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며, 반면에 비록 악플이라 할지라도 댓글이 많이 달려 있으면 그만큼 관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을 오히려 지극히 꺼려한 인물이 한 분 계셨는데,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3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정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진리로 정의를 베푼다는 말은 구원을 말합니다. 이 구원을 위해 주님이 치루신 희생의 댓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보세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부패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 삼기위해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구원의 감격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저는 목회자로서 이 구원이 얼마나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3월에 코로나로 인해 폐가 상당 부분 손상이 되면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폐손상이 오느까 호흡이 얼마나 곤란한자 코에 산소 줄을 끼고 다녔습니다. 또 잘 걷지도 못하죠. 목사인 제가 설교를 해야하는데 설교는 감히 엄두도 못내는 자리에 서니까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너무 너무 허무하더라구요. 87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하면서 성도들의 다양한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장례식도 치루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직면한 분들의 가족을 보면서 나름 위로하며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임종을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내 자신이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섰을 때 생각이 달라 지더라구요. 그동안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안 되드라구요.

 

40여년의 목회가 큰 산에 점하나 찍어 놓은 것처럼 내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는 다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구원과 영혼의 가치를 깨닫기 전에는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죽음의 문제 앞에 서니까 이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엄청난 가치고 축복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 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이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까, 이 은혜를 아니까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예수를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인생의 분기점입니다. 내가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지옥으로 가느냐 하는 생사의 문제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가 달라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2.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심을 말씀합니다. 4

 

4절에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는 때란 당신의 택하신 성도를 결코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고 구원받는 자리에 틀림없이 세우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기력이 쇠하여지거나결코 마음에 낙담하지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1:23절에 보시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여기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임마누엘이라는 의미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겠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구원의 자녀들이 누리는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상처받고 마음 아파 눈물 지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인생의 바닥에 굴러 떨어져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절망 가운데 탄식하고 있을 때, 손을 잡아주시고 등을 두드려주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 마져도 꺼뜨리기를 심히 원치 않으시는 그 주님의 가슴에 내 인생을 던지셔야 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어떤 인생의 짐도 심지어 내가 내 힘으로 벗어 던질 수 없는 죄 짐도 그 분은 당신이 나 대신 짊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아직도 방황하고 있나요? 그 방황 이제는 끝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시간,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져도 꺼뜨리기를 원치 않는 그 주님이 여러분을 이곳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죄 없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예수를 내 인생에 동행자로 삼아 보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은 내 인생에게 다가와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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