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공동체의 붕괴입니다. 특히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아픔은 바로 공동체의 무너짐입니다. 가정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사회단체나 모임의 결속력이 점점 약해집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학교는 관계를 중시하는 공동체였지만, 현재는 그저 공부만 하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처럼 성전에 함께 모이고 떡을 나누며 기도하고 견딜 수 없는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자신들을 환영해 주지도 않는 거리로 달려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쓰나미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너무도 많은 안타까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세상의 등불로 부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세울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무너져가는 가정을 세우고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며, 공동체 의식이 무너져가는 이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을 본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1. 교회는 성도를 다시 일으키는 현장입니다.
4절에 보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갈멜산 정상에서 승리를 외치던 그가 지금은 로뎀나무 아래서 절망의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참하게 자기 생명을 포기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보아도 선지자중 최고의 선지자가 아닙니까? 우리는 이번 한주간 창립 53주년을 돌아보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사람 가운데 가장 능력 있었던 엘리야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많은 훈련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 엄청난 능력의 일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세벨이라고 하는 악한 여자의 말 한마디 때문에 믿음도 사명도 다 포기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한때는 열심이었고 열정적인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말 한 마디 때문에 하루만에 모든 믿음을 포기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 탈진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희망과 의욕에 넘쳐서 열심히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하며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삶의 태도를 갖기도 합니다. 헛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은 자기가 행했던 모든 일들을 부정하게 되며 그것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합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들을 다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지금 엘리야는 광야 길을 가다 한 로뎀나무 아래 그냥 주저 앉아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이 엘리야를 책망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못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큰 소리가 나고 욕이 나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본문 5절을 함께 보십시다. "로뎀나무 아래서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로뎀 나무아래 쓰러져 있는 한 인생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에 탈진해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위해서 천사를 보내십니다. 너무나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줍니다. 여기 ‘어루만졌다’는 것의 원래의 뜻은 영어 성경은 'touched' 라고 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접촉했다는 말입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고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그저 손을 내밀어 접촉하시며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마치 동네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집에 와서 울다가 지쳐서 쓸어져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이의 머리와 몸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어루만지는 엄마와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음식을 줍니다. 엘리야는 이것을 먹고 또 드러눕습니다. 이 행동이 얼마나 화가 나는 행동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또 그에게 다가가서 일어나 먹으라 하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 보세요. 이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는 엘리야를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설득합니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로뎀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그의 길을 이끌어 가십니다. 8절에 호렙산으로 그를 인도하시잖습니까? 여기 하나님의 산 호렙은 시내산을 의미합니다. 시내산은 어떤 곳입니까? 모세가 처가살이로 사십 년 동안 찌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민족 사명을 주셨던 인생을 재생시켰던 장소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절망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살아 계심을 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용서와 회복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있는 장소, 하나님의 산 호렙입니다. 지금의 교회입니다.
2.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이어야 합니다.
12절에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그는 그동안 하나님의 음성 앞에 철저히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고 지냈던 일들, 그리고 사르밧 과부집에서 역시 그는 절망이 스며드는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갈멜산에서의 싸움에서도 그는 환경이나 사람의 소리에 민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이세벨의 소리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인다는 이야기는 분명, 큰 위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에 너무 과잉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과잉 반응을 하다보니까 절제를 잃어버리고 그것 때문에 불안하여 허둥대고 여유를 상실하며, 결국 쫓기는 인생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무너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호렙산에 세워놓으시고 그를 어떻게 회복시키는 줄 아십니까? 엘리야의 이 연약한 모습을 아신 하나님은 먼저 강한 바람으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다음엔 지진이 납니다. 모든 것이 삼켜집니다. 이제는 완전히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은 것은 이런 암시입니다. 이세벨의 말이 굉장히 무섭니? 지진 같이 보이냐? 불 같으냐? 아니 놀라운 바람 같으냐?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거기에는 진정한 능력이 없어. 걱정하지마. 거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여기 ‘세미한 소리’가 무엇일까요?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져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에 피터 로드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자기 집 파티에 플로리다 대학의 곤충학자 한 사람을 초청한 일이 있었는데 자기 집 뒷 뜰에 연결된 숲속을 산책하고 오더니 그 숲에는 적어도 18가지 종류의 귀뚜라미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귀뚜라미라고요?” 그는 그 집에 여러 해 살아왔지만 한번도 의식적으로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실은 약 200가지 종류의 귀뚜라미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문득 이 설교자는 사람은 듣기를 배우는 것이며 듣는 귀는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고 말합니다.
아가서 5:2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0:4절에서 고백하기를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 싼 이 대기권은 온갖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들을 듣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파수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제가 기도의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풍랑을 만날 때 먼저 할 일-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온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의 조용한 음성을 듣는 은혜를 체험하고 계신가요? 과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주님의 고요한 음성이 얼마나 자주 들려오나요? 만일 우리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고 일한다면 엘리야처럼 탈진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없이 일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주님의 고요한 음성을 듣는 심령의 깊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 날부터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살았기에 그는 죽는 날까지 결코 지치지 않는 생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셨습니까? 매우 견고하고 거대하고 멋진 호화선이었지만 바다 위로 조금 튀어나온 빙산이 떠내려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신앙도 내면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침몰할 것입니다. 예배 때 설교를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습니까? 아니면 가려서 듣습니까? 세미한 음성은 내면의 작은 소리지만 엄청난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무시하면 엘리야처럼 자꾸 엉뚱한 소리만 지릅니다. 스펄젼도 자주 교인들에게 외쳤습니다. 설교가 들립니까? 그러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계시록 2-3장에 보면 마지막 때 일어날 7교회를 보여 줍니다. 그 교회 가운데 어떤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칭찬을 한마디도 안하고 호되게 닦아 세우는 교회도 있고, 또 어떤 교회는 칭찬을 쏟아 놓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각 교회를 이야기 할 때 주님이 놓치지 않은 것은 반드시 7교회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3.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3절에서 하나님은 같은 질문을 엘리야에게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9절에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3절에도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기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말은 How are you?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가 아닙니다. Where are you? 너 왜 여기 있니? 너 왜 낙심하고 있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바로 이것이 본문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아니, 창립 53주년을 맞는 우리들에게 질문하는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네가 왜 지금 그 자리에 있느냐? 그 낙심하는 자리에 있느냐? 왜 좌절하며 앉아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새시대를 열어갈 사명을 주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엄청난 사명입니다. 여러분, 로뎀에서 엘리야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희망과 계획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엘리야에게 놀라운 변화로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엘리야가 싸우고 승리하고 다투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면, 이제는 두 나라의 왕을 세우는 일을 맡기십니다. 그의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맡기십니다. 남겨진 칠천 명을 일으켜 세워 많은 민족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가르치는 언약의 백성으로 세워 가는 일을 엘리야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에게 맡기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시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왕을 세워 세상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살고 적당히 신앙 생활하다가 이 정도로 만족하면서 이 땅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꿈이 있습니다. 멈출 수 없는 꿈이 있습니다. 이 땅을 책임지고 살아야 하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역은 '나의 대에서 끝나는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가 가더라도 이어져야 하는 사역입니다. 위대한 엘리야를 끝으로 종말을 고할 수 없습니다. 엘리사에게 이어집니다. 교회는 사람을 세워야합니다. 엘리사라는 한 사람을 제대로 세워 놓으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다음세대인 엘리사를 세웁니다. 교회는 거룩한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빛을 비추고, 썩어가는 이 세상에 소금이 뿌려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음란하고 더러운 세상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새로운 세계가 되길 원하십니다. 저는 53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을 말씀드립니다. 바로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입니다.
거룩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음란하고 더러운 세상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새로운 세계가 되길 원하십니다. 저는 53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을 말씀드립니다. 바로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입니다. 요즘 주목을 받은 책이 한 권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섬뜩합니다. 전영수라는 분이 쓴 [한국이 소멸한다]라는 책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가 다음세대를 세우지 못해서 소멸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가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내에 교회학교가 있는 교회가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태이후 교회학교 예배를 유지하고 있는 교회는 그 중에서도 1/3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에서 교회학교 예배에 출석하고 있는 학생들은 절반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전체 교회의 약 15% 정도의 교회만 교회학교 예배를 유지하고 있고, 그것도 절반 정도만 출석을 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태이후 다음세대 신앙양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무척이나 걱정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의 구원을 위해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허물어져 가는 시대를 주의 영광으로 바꾸어 놓은 것처럼 이제 창립 53주년을 디딤돌로 우리 교회가 공동체로서 사람을 세우고 사명을 온 땅에 펼쳐 나가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져도 꺼뜨리시기를 심히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동성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가 믿음으로 일어나서 시대를 열어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