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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을 바꾼다 고전15:20-24. 5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2-04-16 | 조회: 261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을 바꾼다 고전15:20-24.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오늘 이 부활주일이 그저 종교적 행사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 시대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켰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생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오미크론으로 지난 한 달 1만명에 가까운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한달 사이에 이런 아픔이 일어났습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죽음의 계곡에 서 본 일이 있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에 서 본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여러분의 허파 속으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펌프질을 하는 기계 소리를 누워서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중에는 그 눈빛에 있던 생기의 빛마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 죽음의 계곡은 여러분에게 낯선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계곡입니다.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계곡 밑을 내려다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계곡 끝에 서게 되면 모든 삶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못한 것이 금방 구별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왔느냐,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고,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안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성패, 승자와 패자, 성공자와 실패자라고 하는 어떤 구별도 그 자리에서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기를 꺾어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이 부활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문제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성도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지만,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가 시민들을 세속화시키던 대표적 도시였습니다. 돈과 사치, 부도덕과 음란이 넘쳐나던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의 동의어였습니다. 그런 세속화의 한 복판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세속화의 유혹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 도시는 매우 자유로운 사상이 넘치는 도시이었음에도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세속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곳에서 먼저 복음을 받아 들였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먼저 복음을 위해 살다가 간 자들과 자기 또한 얼마나 비참한 자가 되것인가를 피를 토하듯 증거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16-19절을 정리한다면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다 쓸데 없는 것이 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한번도 한눈 팔지 않고 이 부활 소망을 끌어 앉고 한 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20-21

 

지금 바울은 부활이신 예수님이 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는가를 설명합니다. 고전 15:20-21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여기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에서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5: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여기에서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3장에 등장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죄의 세력이 이 세상에 작동됨으로 모든 인류가 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가 인정을 하든지 우리가 인정을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원죄 아래에서 태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갇힌 인간의 불행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롬5: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쳤으니라"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아무 소망도 없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처럼 인류 역사상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담 안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며 한 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은혜 앞에 서기위해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 다 죽노라.” 왜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매일 부활을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비방자였고 박해자였고 폭행자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옛날의 그런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늘 자신 안에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아침 우리는 어때요? 십자가 앞에 선 가롯 유다처럼, 우리도 십자가 앞에 서면 언제나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께 등을 돌리며 살아왔던 우리 자신을 보지 않습니까? 남들 앞에서는 경건한 체 하지만 십자가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위선적인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죄악에 물들어 있는 더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내가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사는 못난 존재인지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앞에 나를 세워놓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니 여전히 부끄럽고 못난 나의 모습을 보입니다. 여전히 죄에 종노릇하는 내가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여전히 나는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며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앞에 서서 나를 매일 죽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내가 믿음 안에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58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 말씀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죽이는 일에 결코 양심에 가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포악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들 앞에서 그는 묵묵히 그 돌을 맞았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감옥에 가두어도 항변하거나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매를 맞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계 포악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자기 만족을 위해 살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이 두려워 위축되고 세상의 권력 앞에서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담대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는 부활의 증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나약했던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외치며 살았습니다. 그 어떤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결코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증인들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밥 포드의 하프타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성공추구에서 의미 찾기로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만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인생의 신기루 같은 성공은 인생의 모든 가치를 파괴시키고 우리를 허무 속에서 떨게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왔느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이름이 남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과 기회를 발견하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 때문에 내 인생은 보람 있었고, 신바람 나고,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평생의 보람 있는 가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이 부활의 아침!! 한번 잠시 멈추어 중간 평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성공 같은 실패의 인생은 아닌가요? 세상 기준으로도 실패했고 하나님 앞에서도 실패한 실패 같은 실패의 인생입니까? 혹시라도 그렇다면 이대로 인생을 마칠 수는 없습니다. 단 한번인 나의 인생이기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주일부터 고난주간을 보냈습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십자가 앞에 모두 드러내 놓고, 그 고통의 십자가 속에 흘러나오는 가상칠언의 생명의 메시지 앞에 여러분은 어떤 각오, 어떤 도전을 결심했습니까? 이제 부활 신앙으로 좀 더 진지해지고 좀더 증인의 향기를 발하는 인생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도 바울은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 시대에 부활의 증은 바로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서 죄된 나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누구 앞에서도 주눅들거나 두렵지 않는 담대한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은혜가 여러분 위에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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