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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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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것을 자랑치 말라 (약 4:13-17) 2021. 10/1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10-24 | 조회: 282

헛된 것을 자랑치 말라 약4:13-17. 2021. 10/17 이것으로 준비

 

미래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과거 또는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측하고, 그 모델을 제공하는 학문입니다. 1960년대부터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오늘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하도 세상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 앞으로의 미래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증폭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관심을 가지고 이 분야의 책도 많이 보고, 자료들도 검색해 보면서 나름대로 도움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깊은 회의를 갖게 됐습니다. 온통 세상을 이토록 뒤집어놓고 있는 이 코로나19사태를 예측한 미래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19사태의 위기는 오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년이 다되어가는 기간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 우리는 몇 달만 참으면 전염병이 멈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너무 오래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또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코로나19 전염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로나의 종식이 아니라, 코로나와 함께 가야 한다고 위드 코로나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위드 코로나를 시행하는 나라에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로 인해 초긴장 상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런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 나가 미래는 좋은 세상이요 축복의 때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미래는 언제나 우리에게 향기로운 꽃다발을 가득 안은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좋은 내일을 기대하면서, 희망에 부푼 꿈을 안고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데, 왜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 희망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쉽게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없이 계획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여기 들으라로 시작하는 말씀은 중요한 말씀을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철저히 삶을 계획하는 사람입니다. 이 짧은 구절에 네 가지 사실이 나옵니다. ‘도시에 가서분명한 체류장소가 나옵니다. ‘일 년을 머물며그는 분명한 기간을 정했습니다. ‘장사하여사업의 방식도 정했습니다. ‘이익을 보리라이 계획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완벽한 계획입니까? 그는 지금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 역시 여러 가지에 대해서 매일 같이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내일을 대비해서 준비하기도 합니다. 내일을 준비하고 계획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눅14:28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짓는데 계획 없이 시작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계획은 누구 나가 다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의 지적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꿈을 꾸고 목표를 세우는 일은 위대한 것입니다. 꿈도 있고 목표도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왜 이 사람의 태도가 잘못 되었다고 말합니까? 얼핏보면 좋은 계획 같아 보입니다. 문제는 바로 삶의 태도입니다. 자신을 삶의 최종 권위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의 계획 어디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도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상의 모든 계획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한번 해 봅시다. 야고보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켰지만, 사실은 여러분과 저의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하지만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강조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면 다 될 것처럼 여깁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성공을 위해서 막 몸부림을 칠 때 내가 구원주가 됩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성공의 자리,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구원해 내려는 인간의 교만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면 문제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서로 마음이 맞아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가며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유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남녀가 만나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게 기적입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남녀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은 커녕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때가 많습니다. 성격 차이를 극복하는 것, 기질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식성, 취미 차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랑이란 것이 매우 까다롭고 어렵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부부문제만 해도 첩첩산중이지만 자녀문제는 어떻습니까?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됩니다. 대한민국 부모의 교육열은 세계가 알아줍니다. 부모들은 허리가 휘도록 자녀들을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애를 쓰지만 그 결과가 생각하는 것만큼 주어지지 않을 때 헛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부부가 따로 떨어져 사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부부만 힘든 게 아니라 사실은 아이들도 힘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27: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 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무슨 말입니까?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름다운 벽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그 성은 세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수백 명, 수천 명 보초가 지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그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만으로는 헛된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와 절망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의 가정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의 자녀를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6: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하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왜 헛된 것을 자랑치 말라 했을까요?

 

. 우리의 인생이 안개와 같은 인생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14절과 16절에서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인생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가 무엇입니까? 아침이 되면 온 천지가 안개에 가려서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꽉 찬 것 같아요. 그러나 해가 뜨면 언제 사라졌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안개입니다. 온 세상을 다 차지한 것처럼 야단스럽게 호령하지만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렇다는 것입니까? 몇 년 후, 몇 십년 후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랬습니다.

 

내일 일도 모른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하죠. 1-2분 후의 일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주식 시세를 다 알아서 벼락부자가 될텐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험 볼 때, 정답을 다 알테니 어디든 합격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한마디로����인생무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시39:5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고 자신을 돌아보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한 70년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지금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몇 년이나 될까 손가락을 세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내가 한 생을 살았다고 하는 데 그것이 고작 한 뼘에 불과하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처구니없었습니다. 다윗이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 아무것도 아니구나!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굉장한 인생을 산 것 같은데, 나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별 것 아니구나. 한 뼘뿐인 인생,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 다윗은 자신을 정확하게 직시했습니다. 다윗은 시39:5절 중간에 묘한 뉘앙스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 이니이다." 여기서 허사라는 말은 입김혹은 호흡’(breath)이란 뜻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것을 잘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보세요. 우리 인생이 얼마나 덧없습니까? 청년때 가졌던 야망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준화가 이뤄집니다. 50대가 되면 미모의 평준화가 이뤄집니다. 60대가 되면 성의 평준화가 됩니다. 70대가 되면 재산의 평준화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실존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원한 가치가 없는 것에 메여서 아둥바둥 사는 인생이 얼마나 가련합니까? 하나라도 더 세상의 것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인생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나방이 불속으로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15-1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 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무슨 뜻입니까? 주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그 도우심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 내 것이니 내 맘대로 살겠다!" 하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참으로 비참한 삶입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삶은 송두리째 세상에 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 보좌엔 누가 앉아있습니까? 자신이 앉아있습니다. 주님은 어디계십니까? 주님을 영접했지만, 골방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이 불행이 지금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 불행에서 헤어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기 16절에 보세요.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하니라" 여기 허탄은 ' 즉 아무것도 없다는 거짓 혹은 속일 으로 이루어진 허탄이란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헛된 자랑, 다 악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선을 행할 것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선을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한 일을 행할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나중에 하지!" 그러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하며 기회가 있는 대로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선행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선행이라고 하면 남을 돕고, 구제하고, 돈 좀 주고 그러는게 선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선행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선행은 내 생명이 무엇인가를 잘 인식하고,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자세입니다.

 

미국의 사립 명문으로 알려진 필립스 아카데미는 대통령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다수 배출한 학교로 유명합니다. 그 건학 이념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여”(Not for Self)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공부하라는 겁니다. 공부해서 남주자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생이 아니라 이타적인 인생의 목적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르칩니다. 이게 바로 성경적 교육 사상이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 세상의 경제관을 보십시오. 전부 소유의 개념이 나를 중 심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보면 임금 한 삶을 먹이기 위해 수많은 신하와 식솔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5000명이 달려들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한 사람이 5000명을 먹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내가 무엇입니까?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진리 앞에 서지 못한 채 탕자처럼 세상 것을 움켜잡으려 헛된 욕망에 사로 잡혀 살아야겠나요? 그러므로 이 짧은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지혜로운 나그네는 주의 뜻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빠진 삶은 아무리 거창하고, 아무리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과 물질을 영원한 것으로 교환해야 합니다. 교부오리겐(Orige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물질을 천국의 물질로 바꾸는 환전상이다!” 세상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지만, 세상의 재물은 사라지지만,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 재능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사용한 것은 영원히 천국까지 그 가치기 보존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카운트다운을 해야 될 시간입니다. 인생의 카운트다운을 할 때도 됐습니다. 이 계절에 분주했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오늘 본문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새로운 계획표를 다시 짜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뜻 앞에서 계획을 짜십시오. 궤도 수정을 해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의 미래를 세워보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을 각자 아름답고 복된 생애, 영원한 생애로 가꾸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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