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부활주일 요20:11-15. 2021. 4/4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한 여인을 소개하려 합니다.
Ⅰ. 막달라 마리아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여인이 울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눅8:3절에 나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여기 마리아를 소개하는데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라이트 푸드 박사는 이 여인을 소개하는데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는 모래와 같은 황폐한 인생이었습니다. 모래 속에서 꽃이 필수 없는 것은 모래는 생명인 물을 머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 주어도 이내 흘러 내려 버리거나 금방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생명을 머금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모래밭은 언제 어디서나 황폐함과 죽음의 대명사일 뿐입니다. 그처럼 쓸모없는 한심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줄 안 이상,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당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자기들이 희망을 가졌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항 한번 못하고 세상의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 무기력하게 죽는 모습 앞에 모두가 두려움 속에 예수를 등지고 떠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왔습니다. 본문 11절 상반 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더니"(11a) 왜 울었습니까? 보세요, 봉인된 무덤은 열려있죠!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은 없죠, 더울 힘들었던 것은 무덤 속에 시신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마리아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울다'는 동사 klaio는 단순히 울먹이거나 혹은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 간장이 끊어지듯 애곡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모두가 잠든 새벽미명에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다는 창녀였기에 남편도, 자식도, 번듯한 친구 한 명도 없었을 그 가련한 여인이 울부짖는 애곡소리는 얼마나 애절합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통곡하고 또 애곡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왜 이렇듯 슬피 목놓아 울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그녀가 구세주로 믿고 사랑하던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슬픔에 젖어 울고 있는 이 여인에게 한 음성이 들립니다.
Ⅱ.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 말은 “마리아야 내가 여기에 있는데 누구를 찾느냐, 이제 울지 말고 나를 보아라.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마리아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이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서신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십자가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기셨던 그 그리스도가 부활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충격을 받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반가움과 놀람, 충격, 경이로움이 뒤섞여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의 눈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야 왜 우니? 이제 울지 마. 이제 울지 않아도 돼”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의 첫 일성은 ‘왜 우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늘 웃으며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에도 눈물 질질 짜면서 나오는 것보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으며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의 마음도 우리와 함께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데,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가 늘 울상을 짓고 있으면 주님 마음이 기쁘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항상 인상 쓰며 살아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보았던 쿼바디스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네로황제가 로마를 불태운 후에 민심이 들끓자 그 모든 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콜로세움 경기장에 로마시민들을 모아놓고 로마를 불 지른 죄로 저들을 처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경기장에 모아놓고 굶주린 사자들 수십 마리를 풀어놓아 산채로 사자의 먹이가 되는 끔찍한 처형을 계획한 것입니다. 드디어 처형시간이 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경기장 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들이 찬양을 부르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네로가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합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자에게 물려 죽어가면서도 찬양은 계속됐고 저들의 얼굴은 평안했습니다. 네로가 명을 내립니다. 처형이 끝난 뒤에 시체를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떠나고 경기장 안에 시신 조각들이 널 부러져 있었습니다. 네로가 횃불을 밝히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시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얼굴이 남아있는 시신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저들의 얼굴에 웃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네로가 소리를 지릅니다. 왜 사자의 먹이가 되어 죽어가면서도 웃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죽는 그 순간 결코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평안히 천수를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물론입니다. 사고나 병의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박해를 당해 처참한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얼굴이 평안하고 심지어 웃음까지 머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위대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도 죽음 이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죽는 것을 잠시 잠자는 것으로 여깁니다. 누가 잠자리에 들면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녁에 침대에 누우며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앞에 설 때 마치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평안히 죽음을 맞습니다. 심지어 꿈에도 그리던 주님을 뵈옵는 설렘으로 입가에 미소를 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기뻐해야 합니까?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할 때만 기뻐하라’ 그렇게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건강을 잃고 고통스러울 때 기뻐하면 건강이 회복되는 것처럼, 문제가 있을 때 인상 쓰지 않고 문제를 보고서도 기뻐하면 그 문제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고 맙니다. 불평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기뻐하고 웃어버리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매일같이 기쁘고 즐거운 일들만 일어납니다. 느8:10절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말씀합니다. 여기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는 이 질문은
Ⅲ. 더 이상 패배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여기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는 이 말은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놀랍게도 그녀는 주님과 3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을 제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본래 막달라 마리아는 환락의 도시 막달라의 쓰레기 같은 창녀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인류 최초로 부활을 증언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부활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보세요.
3년 동안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모두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신의 한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한 생을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너무나 황홀하기에 이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바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은 이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설명만 하는 시간 되지 말게 하시고 오늘 이 시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우리 가정과 교회 이 사회 앞에 보여주는 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는 동성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임하는 곳마다 지나간 2000년 교회사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확인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체험되는 자에게는 이 부활이 역사적 사실로 믿어진 것입니다. 하나의 어떤 이론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지금 종교다원주의가 횡행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온갖 종류의 공격과 훼손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확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실로 믿어지는 곳곳마다, 개인마다 공동체마다 새로운 은혜의 물꼬가 터진 줄을 확신합니다.
우리 민족의 찬란한 부흥의 역사도 부활절 아침! 저 제물포 항에 내린 두 선교사의 발걸음을 통해서입니다. 특히 언더우드선교사는 1885년 4월5일 날 인천 제물포항에 부활주일을 기념하여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트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보세요. 영적인 황무지 같은 이 땅에 언더우드는 절망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언더우드의 눈에 비쳐진 조선인들은 고통을 받고 살면서도 고통인 무엇인지 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속마음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서양귀신을 전하는 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머지않아 황무한 이 땅이 은총의 땅이 될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약 1500명의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와서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일했습니다. 이 땅에 영적인 어두움을 가르고 시작된 부활의 능력은 엄청난 축복의 열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절 아침에 밖에는 축복의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묻습니다. 오늘 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아무리 힘든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죽음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슬픔에 잠겼던 마리아에게 다가오셨듯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전염병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고,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게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것도 극복할 날이 분명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통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도 부활로 이겨내셨듯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부활로 이겨내는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 비록 해산의 고통을 겪겠지만, 새생명의 탄생으로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고통 역시 반드시 해산의 기쁨을 맛보게 될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코로나를 이겨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 안에 하늘의 기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극복함으로 기뻐하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 누구나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도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오늘을 견딥시다. 견딤이 은혜입니다.
인생의 커다란 문제와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인해서 자포자기 하며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에 용기를 주어 다시금 일어나 뛸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바꿔주십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으로 당당하게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