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32:24-28. 2021. 2/21. 주일 예배
우리는 계속해서 주일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께서 질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양치는 모세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아담에게 다가오셔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 범죄하여 숨어 있는 비참함을 말씀합니다. 인류 최초로 그것도 형제를 죽인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외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쫒겨난 하갈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며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질문의 의미는 바로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인류의 모든 비극은 제 자리를 벗어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 되었기에, 그분과 함께 동행 할 때, 비로서 삶의 가치를 깨닫고 행복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리를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자기 자리를 이탈한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우리 삶의 궤도를 수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화성으로 발사한 퍼서버어런스라는 우주선이 자그만치 6개월 반이라는 기간 동안 4억 7천만 km를 날아 화성에 도착한 것은 어마어마한 인간의 승리입니다. 우주선이 매번 목적지까지 순항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로도 방영된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았던 <아폴로 13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달에 착륙하고자 지구를 떠나가던 중에 일어난 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폴로 13호는 연료탱크 폭발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우주의 미아가 될지도 모를 상황에 처합니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본부와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은 지구로의 귀환을 결정하나, 아폴로 13호가 달을 돌아 지구로 향할 때 아주 정확한 계산 하에서 궤도를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각도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생기면 대기권 진입 때 다 타서 숯이 되거나 대기권 밖으로 튕겨 나가 영원히 우주의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전력과 믿을 수 없는 컴퓨터 그리고 수많은 변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39초간 추진 분사가 시도되고 아슬아슬하게 궤도는 수정됩니다. 마침내 그들은 태평양에 안전하게 착륙합니다. 죽음의 궤도에서 어느새 생명의 궤도로 진입하게 된 ‘아폴로 13호’는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 한 장면 한 장면에서 잘 그려내고 있었습니다.영화 밖 세상에도 그대로 살다간 파멸과 죽음으로 끝날 인생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궤도를 수정하고자 몸부림치는 그들에게서 생명과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듯이 우리 삶도 궤도 수정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선이 궤도를 수정하기 위한 작업보다도 인생이 생명 길로 들어서기 위한 작업은 훨씬 더 어렵고 힘이 듭니다. 힘들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축복의 길임을 알기에 오늘 인생의 궤도를 어떻게 수정해야 할 것인지 말씀을 통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게되면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장자가 되고 싶은 욕심에 일생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성공에 목이 맨 사람이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굼치를 잡고 태어나더니 자라서는 형의 장자권을 빼았아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짐승의 털까지 뒤집어쓰고 기도를 받더니 거짓이 탄로나자 하란으로 도망갔습니다. 하란으로 도망가서도 그의 욕심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두 딸과 두 여종을 아내로 취하더니 재물을 소유하기 위하여 낮에는 더위를 무릎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악착같이 살아갑니다. 야곱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자신의 성공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욕심입니다. 마땅히 바랄 것 이상을 바라고 남의 눈에서 눈물을 빼고 살았던 인생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야곱에게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20년 하란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얍복강 건너편에서 형이 복수의 칼을 갈며 야곱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 에서는 동생에게 당한 고통을 잊지 못하고 동생에게 복수하려고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얍복강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에서는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동생을 환영하러 나온 것입니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서는 지나간 20년간 야곱에게 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야곱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위기 앞에 선 야곱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지 모릅니다. 32:7절에 보면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는 말씀 속에 지금 야곱이 어떤 심정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얍복강 나루터에 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얍복강 나루터에 하나님이 다가 오십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Ⅰ. 인생의 궤도 수정을 하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7절에 보시면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여기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야곱 자신으로 하여금 자기 이름을 고백함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던지신 이 이 음성 앞에 부끄럽지만, 자기의 이름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예, 약탈자 야곱입니다. 네, 간사한 야곱입니다. 예, 저는 나하나 잘되는 것이라면 남을 짓밟고서라도 살았던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20년 동안 오직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얻기 위해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젠 다 잃을 판입니다.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악착같이 살았던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금도 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그는 자기가 그동안 살던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제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형 에서에게 먼저 선물을 보냅니다.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그 내용물이 본문 13-15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이 정도의 가축은 한 도시가 그 도시를 포위하고 위협하는 외국군대로 하여금 되돌아 갈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재산이었습니다. 게다가 각 가축마다 암컷과 수컷을 같이 보낸 것은 증산의 가능성으로 인해 선물의 가치를 한층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가축을 내놓아서라도 에서의 감정을 풀어보고자 했을 만큼(32:20) 에서에 대한 야곱의 두려움은 컸던 것입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가족과 재산을 삼분대로 나눕니다. 1소대 하인의 자식들과 그 재산을, 2소대 레아의 자식과 그 재산을, 3소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의 그 자식과 재산을 그리고 자기는 맨 꽁지에 섭니다. 여차하면 모든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갈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한 나루터에 머물게 됩니다. 선뜻 나루터를 넘기가 편치 않습니다.
22-24절에 보면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기 홀로 남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 고독하고 두려운 밤을 지내면서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제 자기의 인생을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못하는 자기만의 자리입니다. 정말 정신없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밤을 지새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때 주님이 다가오셔서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돌아보기 위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자리 - 이 얍복강이란 말에서 얍복이란 비운다, 몽땅 털어 버린다. 쏟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얍복 나루터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기인생을 철저히 비우는 장소입니다. 벗어야 입을 수 있고,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이 나루터는 결코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않고는 건널 수가 없는 현장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얍복강은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비워야 합니다. 그동안 내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 여전히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회개가 없이는 우리는 결코 회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주님의 이 음성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이 질문은
Ⅱ. 야곱이 변화의 자리의 서기 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야카브“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24-25절에 보면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지금까지 야곱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얻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아무리 자신이 지혜를 짜내보아도 더 이상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세운 방책들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하란에서 20년 동안 얻은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보장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캄캄한 얍복강가에 야곱 홀로 남겨진 그 모습이 마치 지금 자신이 당한 상황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야곱과 그 사람은 밤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씨름을 하다가 날이 새려 하는 그 때 야곱과 씨름하던 그 사람이 ‘이제 그만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과 담판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당신이 이 문제를 풀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꼬일 대로 꼬인 이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은 당신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의 상황을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12장 4절에서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 그분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사한 자기 꾀가 아니라 내 수단, 내 요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더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는데 왜 웁니까? 기뻐 뛰어야지 왜 웁니까? 이 눈물은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속내를 들어내 보이는 눈물이었습니다. 꼭꼭 잠궈 두었던 가식를 털어 내는 눈물이었습니다. 억척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그럴수록 더 외롭고 힘들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실한 고백의 눈물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억척스러워 보였고 강해 보였지만 속에는 깊은 불안과 한없이 약한 모습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을 토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야곱은 환도 뼈가 부러진 다음에야 진실한 기도, 제대로 된 씨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씨름은 야곱의 인생을 바꾼 새벽의 씨름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을 밝힌 야곱에게 28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과 겨루었습니다. 사람과 싸워왔습니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서,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과 싸웠습니다. 사람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가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가 장소적으로 얍복 나루터였다면 시간적으로 새벽녘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버티어 주던 환도 뼈가 부러지는 얍복 나루터!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터 오는 이른 새벽!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Ⅲ. 브니엘의 축복을 주신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긴긴 밤의 싸움이 끝나는 오늘 말씀의 결론 그 마지막 절 30-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여기에 "브니엘"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바뀌고 신분이 바뀐 후 달라진 것은 그가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야곱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의 얼굴만, 조금 자라서는 형의 얼굴을, 하란에서는 장인의 얼굴을, 결혼한 후에는 네 아내의 얼굴을, 그리고 나이 먹어서는 12아들들의 얼굴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얍복강에서 하나님만나고 바라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야곱!! 깊은 밤 인생의 두려움 속에 있던 그가 이제 새 아침을 만납니다. 비록 다리 저는 불구자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전혀 다른 사람, 이스라엘로 일어서게 됩니다. 야곱은 일평생 절뚝거릴 때마다 얍복강 나루터를 건넙니다.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위풍당당하게 불의의 길은 걸어가는 것보다 절뚝거리며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축복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얍복강 나루터에서 깊이 탄식하는 야곱과 같이 인생의 위기와 막다른 벼랑 끝에 다다른 사람들이 요즘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이 나루터에 앉아 계신 분이 있습니까? 전진은 해야하는데 그냥 주저 않고 싶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분이 있나요? 기도는 해야겠는데 기도를 하는 것이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코로나 19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의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는 인생이 있다면 이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에게 다가오신 그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오셔서 회복과 치유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 있고, 지금의 상황 앞에 주저 앉고 싶은 환경에 처해 있을 찌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올라야합니다. 믿음의 날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천국의 생활을 맛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강한 믿음의 날개만 있다면 그래서 높이 솟을 줄만 안다면 언제나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볼 수 있고, 바위에서 샘이 터지는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풍성함을 맛보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아침!! 한번도 인생을 바꾼 새벽의 씨름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다시 일어설 때 브니엘의 아침 햇살이 비쳐올 것입니다. 분명 태양은 태양인데 어제의 그 태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 - 브니엘의 태양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