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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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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2 흩어진 사람들 (행8: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3-12 | 조회: 1119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여기서 '그 날'이란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던 날을 의미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 한 사람의 순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몰아닥쳤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계속 붙잡고 있는 초대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 분쟁이 많고 타락된 교회라면 핍박이 있어도 당연합니다만 초대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유무상통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처럼 할 일을 안 하는 교회, 말만 하는 교회라면 또 한 번 핍박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행동하는 교회요, 이적과 기적이 있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동반하는 그런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참으로 납득이 가지를 않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로 큰 핍박이었던지 그리스어 원문은 megas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만 배를 뜻하는 영어 단어 mega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메가톤 급 대 핍박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여, 남녀를 무론하고 닥치는 대로 끌어다 옥에 넘겼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잔멸했다는 단어는 원래 멧돼지가 포도밭을 마구 짓밟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폭력적이고도 잔인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잔인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 핍박이란 사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 이제는 다시 잡히면 죽을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집을 두고 목적지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도망입니다. 도망자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온 민족이 함께 당하는 수난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당하는 수난입니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 했고, 쫓겨 다니는 도망자로 방랑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본의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쫓기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고, 여기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흩어져야 했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흩어져야 하는지? 당시에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왜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흩어졌다는 사건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흩어지다는 농부가 사방으로 씨앗을 뿌리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 씨가 어디에 뿌려질지는 농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 1절에 다 흩어지니라는 표현은 능동적으로 사람들이 흩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수동태로 흩어짐을 당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박해라는 도구를 통해 의도적으로 흩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었고, 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고, 교회가 흩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섭리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행전1:4절이나 눅24:4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전1:8절에 의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주하려 하였고 현재에 만족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다 낙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또한 재림 주를 맞이하여 거기서 즐기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이방으로 떠나야 할 사람들이 이방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람들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안일한 민족과 자기 중심적인 것에 도취되어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대부분이 보금자리 속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행복해. 나는 더 이상 바라지도 않아. 나는 만족해.“ 하며 꿈 같은 세상을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이상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경우 에는 마음속에 몹시 불안한 감정이 일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심각한 문제가 개입될 때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부모가 원치 않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자기 자녀로 선택해 놓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의 삶의 보금자리를 흩어 놓을 때가 많습니다. 이는 세상의 잔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을 끌어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가 세상 적으로 형통하면 이런 시험이 옵니다. 주님은 무엇이라 경고합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로 굴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가끔 보면 우리 가운데 영적 위기를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를 하나님이 깨우시는 날이 옵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날입니다. 흩으시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것을 징계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어려운 시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빠져 있던 자리에서 빨리 나오라고 깨웁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 두 번은 모두 체험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까? 왜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을까? 왜 우리 집에 이런 일들이 계속 될까?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보금자리를 흩어놓고 계십니다. 이유는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떨쳐 버리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일단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라는 것입니다. 잠을 깨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라고 하였습니다. ‘흩어졌다는 말은 앞서 억지로 된 일입니다.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간 것이요, 그럴 수밖에 없기에 불가피하게 되어 진 일입니다. 이것은 피동적이요, 수동적이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루 다닙니다.’ ‘두루 다니는 것은 자율적인 것입니다. 이는 능동적이요, 자원 적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의와 자율로, 무의미한 방랑의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세계관입니다. 주어진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저들은 정든 고향과 자기 집을 두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남의 땅에 가서 살게 되었지만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신세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왜, 누구 때문이냐며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어떻게 잿더미 같은 그 처참한 환경에서 그렇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들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위로와 능력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인생을 투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이들은 고난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분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요즘도 경기가 안좋다, 힘들다 하면서도 우리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가는 것 좋겠지만, 꼭 여수에 있는 애향원을 가족과 함께 다녀오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평생 순교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나환자들과 인생을 함께 했던 곳입니다. 거기에 가면 옛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문둥병으로 모두가 외면한 곳이지만, 복음을 받은 성도들은 정말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데 거기에 가면 토플하우스라는 게스트 하우스가 있습니다. 이곳은 20여년이 넘도록 나환자를 치료한 미국인 선교사 스탠리 토플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분은 미국 애틀란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 대학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학이고 특히 이 대학의 의과대학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을 할 때 쯤 학교신문에 난 기사를 읽게 됐습니다.

 

당시 이름도 생소한 한국의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애양병원이라는 곳에서 의사를 구한다는 광고입니다. 당시 켈리 웅어(Kelly Unger)원장의 후임을 구한다는 광고입니다. 이 광고 기사가 이분의 마음속에 강력한 울림이 되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 병원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자기의 진로를 생각할 때마다 이 병원이 떠오릅니다. 이분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가서 이 병원에서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셨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모님과 가족들이 반대합니다. 일류대학 의과공부를 시키고 부유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가족들은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약혼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약혼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가겠다면 자기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가족들의 반대와 약혼녀의 선언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욱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강력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기도 중에 이분은 이것이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의 반대와 약혼녀와의 파혼을 무릎 쓰고 한국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오지인 한국의 여수 애양원에서 20년 넘는 긴 세월을 보내며 헌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저마다에게 자기가 지고 갈 십자가를 맡겨주십니다. 때로는 그것이 교회 안에서 져야 할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고생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어서 맡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에게 맡겨주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누군가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탁하신 일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실 수 있습니다. 박해를 견디며 고난을 무릎 쓰고 감당해 내야 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면 신앙생활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생을 끝마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29:1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하나님은 우리가, 우리가 형통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고생고생하면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렘 애3:32-33절에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보세요.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잠깐 선한 뜻이 있어서 허용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평안하고 형통한 자리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대학 시절 혼전 임신을 하는 바람에 양가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황급히 결혼한 집사님이 있습니다. 예단비로 간신히 월세방을 얻어 살게 되었고 남편의 대학 등록금을 벌어가며 연년생인 두 아들을 낳고 키웠습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연명해 가던 중 셋째를 임신했을 즈음 통장의 잔고가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단 한번도 가난을 겪어 본 적이 없던 집사님은 그 어려움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잠깐 겪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큼 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셋째를 출산할 때 하혈을 많이 해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 수혈을 하면 피값이 비쌀텐데하며 처음으로 돈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 6년 동안 끼니를 걱정하며 살면서도 기도라고는 해본 적이 없던 집사님은 그 사건 이후로 예배 때마다 통곡을 하며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이제 도저히 한 발짜국도 못 가겠어요하며 절규할 때 비로서 그동안 무엇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자상한 남편을 우상으로 여겼던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상한 남편만 바라보고 살았으니 주님이 그 집사님 안에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이 자매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후로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매 달렸습니다. 생활의 곤고함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여호와를 기대하는 삶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막내아들의 기저귀 샘풀이라도 얻어야 겠다는 마음에 신청한 기저귀 모델 선발 대회에서 막내가 당선되어 tv 광고 모델이 되면서 하나님은 저희 가정에 땟거리를 채워 주셨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광고 사진을 촬영하면서 실장님이 삼형제의 프로필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셨는데, 그 사진 덕분에 큰 아이가 아동복 모델로 스카웃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태어나서 한 번도 입혀 본 적이 없던 브랜드 옷을 아이들에게 입힐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어려운 집안 형편을 알게 된 실장님이 비싼 연기 학원에 아들을 무료로 다니게 해 주셨고, 불록버스터 영화에 아역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가정에 부어 주신 축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몇 달 전에는 230:1의 높은 경쟁을 뚫고 장기 전세 임대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입술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감사기도가 나옵니다.“ 이 집사님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자신의 가정을 출애굽시켜 주신 하나님을 세 아들에게 증거하며 감사와 찬양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나는 이 자매의 고백 속에서 이런 이야기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남편을 우상으로 여겼던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다. 자상한 남편만 바라보고 살았기에 주님이 그 집사님 안에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비로서 고난의 파도가 삶에 파고 들 때, 하나님이 그의 삶을 잠시 흩어 놓으실 때, 그의 시선은 환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파도치는 인생의 파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가지고서도 고난 앞에서도 감사와 찬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4: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며 고난까지도 감사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요즘 나라가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탄핵이 되어 대통령 직을 잃었습니다. 모두가 무겁고 찹찹한 마음입니다. 지금의 난국이 잘 수습니 되어 보다 나은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계기로 우리 역시 자신들을 깊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보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도 압도적으로 당선되지 못하고, 당선된 후에는 모두가 지지도가 하락할 뿐 아니라, 퇴임 후에 계속해서 존경받는 분들이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사심 없이 섬기기를 다했던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또 뜻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올라야합니다. 믿음의 날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천국의 생활을 맛 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날개의 힘이 없어서 높이 날지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우리가 강한 믿음의 날개만 달면 그래서 높이 솟을 줄만 안다면 언제나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볼 수 있고, 바위에서 샘이 터지는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풍성함을 맛보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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