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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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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6 (3.1절 기념 예배) 잊지 말아야 할 3.1정신 (신8:11-1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3-05 | 조회: 1151

 

파락호라는 그런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양반집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그런 난봉꾼을 이야기 할 때 이 파락호라는 이 단어를 씁니다. 파락호 중에 일제 시대때 안동에서 이름을 날리는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노름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노름을 너무 좋아해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이 사람이 빠지는 법이 없었고 마지막 배팅을 좋아해서 마지막 승부에 모든 것을 다 겁니다. 그래서 따게 되면 즐겁게 갖고 가게 되고 혹시 자기가 잃게 되면 몽둥이다 하면 몽둥이를 든 그의 아랫사람들이 현장을 덮치면 판돈을 챙겨 유유히 사라져가는 아주 질이 안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노름으로 잃어버린 돈은 수백년 동안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는 전답 18만평평을 잃어 버렸습니다. 요즘 18만평이라면 요즘 가격으로 200억인데 요즘 땅값이 많이 올라서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종손이니까 문중 자손들이 할 수 없이 돈을 모아서 잃어버린 그 땅을 다시 사가지고 회수해서 돌려주면 또 노름해서 날려버리는 난봉꾼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무남독녀인 외동 딸이 시집을 가서 시댁에서 돈을 받아왔습니다. 장롱을 사오라는 그 돈까지 노름을 해서 다 탕진을 합니다. 딸이 울며 어쩔 줄 모르니까 자기 어머니가 쓰던 농을 들려서 보냈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얼마나 주변에 조롱과 비난을 들었을까요? 이분은 해방이 된다음 1946년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놀랄만한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가산을 탕진했다고 일려진 이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 투사였음이 이 분이 죽고 난 뒤에 밝혀졌습니다. 그가 노름으로 날려버렸다고 했던 모든 돈은 만주의 독립자금으로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아야 일제의 눈을 피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쏟아졌던,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에 스러운 그것들이 그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가족 간의 화평함까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다 바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한 분이 머리맡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이젠 말해도 되지 않겠나.” 이렇게 했더니 이분이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아무런 말도 하지 말게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말없이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안동을 가시면 안동 독립 기념관에 이 김용환 선생님의 일대기가 전시 되어 있고 1995년 건국 무공 훈장을 추서 받게 됩니다. 난봉꾼과 노름쟁이라는 그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누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독립 자금으로 보낼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원했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그가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친 이 사람은 어떤 마음밖에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는 나라에 우리 자녀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은 3?198주년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3?1절의 역사도 깊어져 3?1절을 경험한 세대들은 극소수만 생존하고 있습니다. 전후 세대들은 그 때의 아픔이나 고뇌를 잘 모르기에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압제를 당할 때 현실의 암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고픔과 절망과 서러움을 경험하였습니다. 서러움 중에는 나라 없는 설음이 최고입니다. 내 땅에서 남의 지배를 당하고 농사를 지어도 모두 수탈당하고 처녀들이 공출당하고 젊은이들이 좌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라의 소중함을 발견하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고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남들은 오늘 한국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배경에는 이런 고난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신명기의 말씀은 가나안의 문턱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 채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면 너무 잘 잊어버리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신 말씀이 신명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잊지 말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날 430년 동안 애굽 땅에서 겪었던 고통과 지난 40년 동안 광야생활하면서 겪었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은 극심한 흉년 때문에 가나안 땅에 살 수 없어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아들 요셉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일강 삼각주에 위치한 비옥한 땅 고센에 머물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등장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졸지에 자유인의 신분을 잃고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거대한 국고성을 짓는 공사에 투입되어 힘겨운 노역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아 기르는 기본 권리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아이들을 악어의 밥이 되게 해야만만 하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그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는 버림받은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그 사랑하는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슬픔의 자리였습니다. 그런 비극과 절망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로 강대국 애굽에서 탈출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그 아픔과 고통의 기억을 떨쳐 내버릴 만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의 삶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애굽이라는 나라와 원수처럼 지내며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나날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애굽의 때가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정복이라는 야망을 품고 칼을 갈고 있었을 때 우리 조상들은 당쟁을 일삼고 있었고, 우상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일본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무력으로 우리의 국권과 강토를 빼앗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짓밟으면서 민족의 혼 자체를 말살하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와 위안부로 끌려가 동남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없이 죽어갔습니다.

 

교회에 가해진 박해 또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전쟁물자로 사용하겠다고 종탑의 종들을 철거해갔고, 모세오경과 요한계시록은 삭제를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설교하지 못하게 했고, 사복음서만 읽게 했습니다.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예배 전에 일본 국기에 배례를 하게 했고, 19439월부터는 주일 밤 집회와 수요기도회를 아예 모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민족지도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가두었습니다. 그리고 1945818일에는 그들을 모두 학살할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말과 성씨와 자유와 젊은이들과 민족의 혼을 빼앗겨 버렸던 어두웠던 시대가 우리 민족에게 있었습니다. 이제 3.1 운동이 일어난지 9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아픔과 상처를 너무 많이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지금 본문의 모세는 신명기 32:7절에서 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왜 그 옛날을 기억해야 합니까? 왜 그 고통스러운 때를 잊지 말아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잊어버렸을 때에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감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40년 동안 힘든 광야생활을 해 왔습니다. 말이 40년이지, 40년 광야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 힘든 광야의 사막길을 걸어갈 때에 애굽을 기억하면 새 힘이 났습니다. 애굽에서 자유를 잃고 희망까지 잃어버린 채 살던 그 때보다 광야 사막길을 걸을 때가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분명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광야에서 지내던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강조를 합니다. 광야에서 힘들고 부정적인 면만 바라보는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하여 끝없는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붓습니다. 광야는 분명히 고통스럽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광대하고 위험하고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리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입니다. 고통스러운 광야의 현실만 바라볼 때 얼마든지 다시 애굽의 생활양식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고 내 뜻과 내 고집과 내 실력만 앞세우는 인본주의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마귀가 꼭 그랬습니다. 고통스러운 광야의 현실만 바라보게 해서 돈과 명예와 권세만 붙들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최우선해서 붙듦으로서 마귀의 유혹을 차례로 물리치셨습니다. 광야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져주시는 섭리와 보살핌의 장소가 광야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체험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잘 되더라도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 40년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한국은 98년 전의 상황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일제 36년 동안 뼈저린 고통을 겪었고,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는 광야와 같은 고난을 치른 세대입니다. 극심한 가난을 딛고 일어나 그래도 세계에서 11위 안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한 썩는 밀알과 같은 세대였습니다. "잘 살아보세!" 외치면서 일만했을 뿐 여가가 없었습니다. 언제 취미생활을 했습니까? 언제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까? 일만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도 1, 20년 전부터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고 사는 재미를 맛보자 변질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합니다.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칙이 되지 못했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사는 어떤 원칙이 있었습니다. 러나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큰 집을 짓고, 여유 있게 살고, 여가를 즐기며, 재산을 축재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만이 나의 삶을 유지한다는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모순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우리의 자녀들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가겠습니까?

 

여기 보세요. 본문 17-18절을 보면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혹시라도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으로 모은 것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조심하라는 말씀이지요. 재산을 모으는 힘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게 되면 19절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여기서 증거하노니 이 말은 영어 성경을 보니까 엄중하게 경고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은 이 말씀을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부패하고 음란하고 모든 면에서 부도덕했습니다. 이방의 빛이 되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소홀히 했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의 축복을 주셨지만 이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분단으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나라가 됐는데, 각각 앗수르(B.C. 722)와 바벨론(B.C. 586)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고난 속에서 살아온 민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찌에 의해서 600만명이 학살된 것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에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야드바심이라고 붙였습니다. ‘야드바심이란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 기념관 입구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백악관 건너편에도 유대인 학살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그곳에 갈 때마다 후손들이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어려움을 잊고 살면 망한다는 것을 뼈 져리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고 살고 있진 않습니까?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사건이 터지면 쉽게 흥분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는 근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아픔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를 받은 그 고통에서 이 땅에 해방을 위해 비폭력으로 삼천리 방방 곡곡에 태극기를 들고 외치며 수많은 우리의 선열들이 죽음으로 항거한 이 3.1절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1 독립운동 98주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우리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위대한 민족의 대행진에 한국교회가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1600만 명의 국민 가운데 1.3%가 한 20만명 정도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가 당시 민족을 일깨우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리더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으며, 거사 준비 과정에서 중심되는 인물 48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24명 이었다고 문헌은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3·1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는 소수였지만 이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절망 가운데 지쳐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를 세워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했습니다. 병원을 세워서 죽어가는 이 땅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800만이다, 1000만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남은 자,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빛과 소금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숫자가 100만만 되어도, 아니 남은 자가 10만만 되어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강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 때문에! 이 민족의 미래가 소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때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에 스러운 이름으로 비난을 받았던 김용환 독립투사의 이야기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라도 해서 독립자금을 만들어 줌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을 꿈꾸었던 것처럼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갈망을 했습니다. 이제 98주년을 맞이한 3.1 운동의 정신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얼마나 갈망했습니까. 얼마나 희망했고 기다렸고 고대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대한민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사방에 욱여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100여 년 전 세계열강이 조선을 잡아 삼키려하던 때와 흡사한 형국입니다. 사방에서 우리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대통령은 탄핵 발의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민심은 나뉘었습니다. 실물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가장들은 실직하고 조기 퇴직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몰리면서 청년실업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왜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셔서 이처럼 살게 하십니까? 한번 대답해 보세요. 아마 다들 생각이 있겠지만, 교회는 마음 둘 곳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는 등대가 돼야 합니다. 도피성과 같은 생명의 피난처가 돼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으로 편을 가르기보다 상처받은 영혼을 품어야 합니다. 역사와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 앞장서는 우리 동성 교회와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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