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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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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26 스데반 - 면류관의 주인공 (행7:54-8: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2-26 | 조회: 1353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를 혼란 속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짜 뉴스입니다. 이 가짜 뉴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기도 하고 심지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바꿀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 대선에 트럼프 당선에 이 가짜 뉴스가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떠도는 이야기가 사실인냥 기사형태로 s.n.s 와 같은 정보망을 타면 진위를 가릴 시간도 없이 얼마든지 사람들 속에 파고들어 엄청난 결과를 양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거짓된 것을 사실처럼 만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에 국가를 이끄는 유명한 지도자들이었어요. 스스로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왜곡된 진리를 바르게 증거하려는 한 믿음의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신약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를 만듭니다.

 

스데반은 오순절 사건 때 사도들의 전도로 예수 믿었고, 이제 1년이 채 안 된 초신자입니다. 그는 그의 생애에 단 한편의 설교를 하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사도행전 72절부터 53절까지는 스데반이 증거한 설교입니다. 그는 여기서 구약의 역사를 단숨에 요약해주고 있는데, 대략 6가지 사건으로 구약의 역사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6절까지 그는 창세기를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17절부터 41절까지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길게 요약합니다. 곧바로 세 절 말씀, 42절부터 44절까지 짧은 구절을 가지고 민수기와 신명기를 요약하며, 한 절 말씀 45절로 여호수아를 끝내 버립니다. 그리고 46, 47절 두 절에서 사무엘 하부터 역대 하까지의 역사를 함축합니다. 마지막으로 48절에서 50절까지는 에스라에서 말라기까지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 7장에 나타나는데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그 반복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종과 불순종', '믿음과 불신앙'입니다. 믿음을 가졌습니까? 그러면 순종합니다. 믿음이 없습니까? 그러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지금 스데반의 설교는 역사를 이 두가지 주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예를 창세기에서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순종하기 쉬운 환경에 있었나요? 순종하기 쉬운 명령에 있었나요? 아닙니다.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75년 동안이나 정들었던 고향을 어떻게 쉽게 떠날 수가 있나요? 그 아비와 친척을 버리고 한번도 가 보지 않은 땅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 길을 갑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순종의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불순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불순종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 믿음의 조상의 신분을 가진 열 형제가 요셉을 시기해서 은 20에 그를 팔아버린 겁니다. 아버지를 속이고요. 믿음의 조상의 신분을 가졌던 열두 명 가운데 열 명이 불순종했다고 스데반은 지적합니다. 또 다른 예를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씁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 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수많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서로 원망하며 불평하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려고 하고,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며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스데반의 설교 요지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스데반이 지금 말씀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 포인트는 이 불순종의 사건들이 과거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데반이 과거 얘기를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이해가 빨랐을 겁니다. ? 자기 조상들 중 불순종한 사람과 순종한 사람들의 역사를 서기관들은 너무나도 환히 꿰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스데반은 갑자기 그 설교의 시제를 바꿉니다. 과거의 불순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불순종을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과거 역사에서 불순종한 조상들을 보았느냐! 그러나 그 불순종의 죄악이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 우리들 중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주님을 섬기고, 똑같이 신앙인이라고 하는 이 사람들 가운데서도 순종의 사람들과 불순종의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불순종의 사람들의 특징이 3가지임을 이야기를 합니다.


1.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5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여러분, 겉은 화려하고 믿음의 사람 같아도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은 성령을 소멸시킵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물을 끼얹는 겁니다. 불길이 확 줄어들 듯이 성령님의 역사에 항상 물을 끼얹어 꺼버립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아무리 주일성수하고, 아무리 십일조를 드리고, 아무리 오래 교회생활해도 성령님께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불순종의 사람이라고 스데반은 설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멸망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해서 멸망했나요?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거절했기에 멸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나요? 그분의 뼈아픈 지적을 받고 울어 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그분의 교정의 음성을 듣고 엄히 무릎을 꿇고 "주여,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그렇게 겸허히 성령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맡겨본 적이 언제입니까? 성령의 사람, 참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굴복합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사람은 항상 성령을 거스릅니다. 이 불순종의 사람들은2. 성령을 거역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합니다. 52절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에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 이 말은 조금 어려운데, 너희 조상들이 도대체 핍박하지 않은 선지자들이 있었더냐? 너희 조상들이 한 행위는 선지자들을 언제나 핍박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선지자들을 핍박했는가? 그 다음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골라가면서 다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무슨 말입니까? 의인이 오실 것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죽인 사람과 그 의인이 마침내 왔는데 그 의인을 죽인 사람들이 지금 스데반 자신을 사람들을 선동해서 여기 끌고 온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설교가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찔렀는가를 상상하시겠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3.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3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불신앙의 사람들은 수없는 설교를 듣고 수없는 예배와 말씀을 읽어도 순종치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목이 곧다고 표현합니다. 51절을 보세요. 그는 그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자기 생각이 너무 꽉 차 있는 겁니다. 자기 경험이 제일입니다. 자기 지식이 제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을 곧게 하는 것이죠. 교만한 겁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입니다. 마음도 옛 마음이요 귀도 옛 귀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지만, 여전히 옛날 세상 소리의 하나로 들어버립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여기 54절의 말씀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찔렸다' 라어로 '디에프리온토'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박혔습니다. 주의 말씀이 화살같이 그 마음에 꽂혔는데, 이젠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회개는커녕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갈다로 번역된 브뤼코(briko)’물어뜯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분기탱천하여 짐승처럼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사도행전 2:37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이 찔려 똑 같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찔렸어요. 자신들이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예수가 바로 구원자이신 메시야임을 알 때, 그들의 가슴을 후비듯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메시야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절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찌할꼬 하는 탄식이 쏟아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은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사람에게 결코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리고 그의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과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은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도 범죄한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습니다. 그리고 책망을 듣고는 곧 회개하였습니다. 이미 범죄로 인해서 마음에 엄청난 고뇌를 하고 있을 때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 책망의 소리를 들은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범죄 현장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윗은 나단 선지자 앞에서 시치미를 뗄 수도 있었습니다.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을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어버리거나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입만 막으면 아무도 자신의 죄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놓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책망으로 듣고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실토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니까 다윗의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죄를 인정하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에 시달릴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해졌습니다. 죄의 올무에서 놓여난 해방의 기쁨이 밀려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스테반의 설교를 들은 그들은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귀를 막고 그를 끌어다 돌로 쳐 죽이는 자리에 섭니다.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를 갈았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가슴을 열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렇게 짐승수준으로 이를 갈면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최고의 법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자기들의 모든 치부를 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 있는 스데반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속히 그 자리를 떠나 도망쳐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본문 55-56절을 보십시오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7:55-56) 이제 스데반은 빠져나올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 그가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입니다. 여기 60절을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릎을 꿇었다고 본문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언제 꿇은 겁니까? 뭇돌에 맞았어요. 이미 육신은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정신은 혼미해집니다. 이제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에, 끝이라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스데반이 무릎을 꿇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남의 얘기로 읽지 마시고 상상해 보세요. 수많은 그 동안 알아왔던 여러분의 친구들이, 같이 교회 생활하던 유대교의 친구들이 돌을 들고 갑자기 원수가 되어서 자기를 내려칩니다. 돌이 날아와 머리를 쳐서 피가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온 갈빗대를 치고 다리를 칩니다. 그 순간에 스데반은 무릎을 꿇었다고 얘기합니다. 돌무더기 속에서 지금 엉망이 된 육신, 정신은 오락가락 합니다. 한 가닥 남은 정신마저 가물가물 사라져 갑니다. 이러한 순간에 무릎을 꿇은 겁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기도 없이 내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그래서 넘어져 가는 몸을 가누면서 한사코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군중의 고함소리와 온갖 저주, 그 수많은 돌 세례 속에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이 하루아침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도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친구들이 돌을 던질 때에,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닙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에 가능했던 줄 믿습니다. 스데반은 늘 기도했습니다. 늘 언제 어디서든 기도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쁠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도 그는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내 몸에 병이 찾아올 때, 누가 나를 저주할 때...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는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평소에 기도하던 모습대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용서의 기도입니다. 사랑의 기도입니다. , 이 기도는 정말 힘든 기도가 아닙니까? 지금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이런 기도가 과연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나에게 고통을 안기고 아픈 상처를 준 자를 용서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시간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의 허물과 죄를 십자가에서 다 끌어안고 덮어 주지 않았니? 너도 그 용서를 삶에 실천을 하라는 것입니다. 12:17-21절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침되고 신실한지는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믿음의 진위 여부를 구별하지 않아도 절로 구별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몰라요!! 다 각오도 다짐도 하지만, 정말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자인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충성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진실되이 되돌아보십시다. 과연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진실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깨끗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못난이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죄악 투성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허물투성이이고, 교만덩어리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회개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늘의 평화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마음에 담겨진 죄악을 다 털어버리도록 하십니다. 책망하심으로 회개하여 용서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에만 우리가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천문학자요 근대 자연과학의 지평을 열었던 코페르니쿠스가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언을 따라 그가 묻혀있는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인정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의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기쁨은 용서받는 기쁨입니다. 다른 모든 기쁨은 그 용서받는 기쁨 위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것이 됩니다. 용서받는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스데반, 그는 이름 그대로 면류관의 주인공입니다. 용서받는 기쁨 - 그건 최고의 기쁨입니다. 용서받는 기쁨 - 그게 신앙인으로 살도록 하는 은총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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