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밝은 표정을 지닌 사람들 보다는 무겁고 우울한 표정을 가진 분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 요즘 경제나 사회의 분위기가 우리를 어둡게 만드는 요소가 있어서 그런지 그 얼굴만 봐도 환한 얼굴 보다 기쁜 얼굴보다는 초조하고 짜증스러워하며 뭔가 분노가 섞인 듯한 눈빛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얘기할 것 없이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말 마음 깊이에서 평화를 느껴본 때가 언제입니까? "아! 너무 평안하다!"하는 샘솟듯 기쁨이 일어나서 견딜 수 없었던 그 평화를 맛보았던 때가 언제입니까? 아니,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런 때가 있기는 하셨습니까? 성경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기쁨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1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천사의 얼굴
천사의 얼굴은 어떤 얼굴입니까? 잘생긴 얼굴일까요? 피부가 하얀 너무너무 부드러운 얼굴일까요? 아닙니다. 유명한 배우 가운데 여우 주연상을 받은 사람을 보고, 우리가 그녀를 미인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천사의 얼굴과 같다'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탤런트들을 보고 미남, 미녀 혹은 잘생겼다고는 할지 몰라도 천사의 얼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사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얼굴입니다. 즉, 마음의 평안이 어찌나 큰지 그 기쁨이 얼굴에까지 배인 사람, 그 평안이 얼굴에 나타나는 사람을 성경은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에 얼굴은 본래 ‘얼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얼’은 영혼을 의미하고 ‘꼴’은 모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얼굴은 영혼의 모양이란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얼굴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릇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입니다. 똑같은 그릇이라도 내용물에 따라 달라집니다. 밥그릇이 되기도 하고, 국그릇, 반찬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상자라도 내용물에 따라 보물 상자도 되고, 쓰레기 상자도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이 강건하고 아름다워지면 외모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가치는 영혼에 있습니다. 물론 육체도 귀합니다. 기독교는 육체를 죄악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육체보다 영혼이 중요합니다. 삼상16:9 보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영혼을 더욱 중시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스데반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Ⅰ. 주님의 참 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테반은 갈릴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초기부터 주님을 믿은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초대 교회가 태동하면서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의 시기는 초대 교회 태동이후 오래지 않아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스테반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요즈음으로 말하면 초신자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전능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기사와 표적이 놀랍게도 일천한 신앙경력 밖에 없는 스테반을 통해서도 똑같이 드러났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2,3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보다 7장에 스테반의 설교는 월등했습니다. 신앙의 연륜으로서는 사도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수준에 관한 한 스데반은 이미 사도와 대등하거나 더 우위에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줍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기만하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능력을 그를 통해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미천한 신앙경력 밖에 없는 스테반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 중심을 다해 주님의 제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연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반드시믿음이 출중한 것도 아니요. 초신자라고 믿음의 경지가 얕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느냐에 판가름이 납니다.
본문에 보면 이 스데반에게 엄청난 위기가 옵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 구제 일을 보도록 집사로 세워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 민간에서는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며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센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복음 전파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10절을 보니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스데반을 논리적으로 반박해서 이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공작을 꾸밉니다. 11-13절에 보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들을 사주했습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우리가 들었노라” 둘째, 당시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을 격동시켰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그래서 스데반은 공회에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 아예 죽이기로 작정 합니다.
너무 억울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스데반에게 감당키 어려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데반은 7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끔찍하게도 돌에 맞아 순교하고 맙니다. 지금 이런 상황이요.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얼굴은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얼굴이 아니라 오히려 천사처럼 빛이 났다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거세게 밀려드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서도 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빛이 났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보통 사람 같으면 모두가 두려워 할만도 한데 어떻게 당당할 수가 있습니까?
2. 성령이 지배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스데반이 성령에 강하게 붙들림을 받아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성령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왜 천사의 얼굴과 같아 질 수가 있습니까? 성령에 충만을 받으면 그를 주관하는 자가 자신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를 주관하시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곧 성령이 부리시는 천사의 얼굴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테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은 흔히 우리가 상상 석에서 연상하는 천사나 성화 속에서 천사차럼 그런 해맑고 아름답기만 한 얼굴이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천사로 등장하는 천사는 한상 밝고 좋은 소식이나 일만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전하는 역할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사의 얼굴은 시도때도 없이 해맑고 이름답기만 한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 반드시 수행하겠다는 결연한 표정의 얼굴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거짓으로 모함하고 죽이려는 그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진리를 반드시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스데반의 결연한 표정을 본문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표정을 성경 안팎에서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미지의 가나안을 향해 결연히 나아갈 때, 그의 얼굴이 천시의 얼굴과 같지 않았겠습니까? 모세가 ‘내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좆아 당시 세계 초강대국인 애굽의 바로와 단신으로 맞설 때, 그의 결연한 얼굴이 천사와 같지 않았겠습니까?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죽음을 무릎쓰고 아기 예수를 잉태 할 때, 그녀의 결연한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아니었겠습니까? 마틴 루터가 거대한 권력 집단인 부패한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기치를 결연히 들어 올릴 때,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지 않았겠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고 결연하게 순교로 신앙정절을 지킬 때, 비록 그의 얼굴은 잔혹한 고문으로 이지러졌을망정 하나님께는 천사의 얼굴로 비쳐지지 않았겠습니까? 온 중심을 다해 결연한 진리를 지키려는 얼굴보다 더 눈부신 얼굴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그 얼굴이 성령 충만한 얼굴이요 천사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스데반 주변의 사람들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모함한 그래서 진리는 안중에도 없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 태연하게 죽이려는 그들의 모습 속에는 분명 천사의 모습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악마의 얼굴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돈 주머니, 세상의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유혹을 했습니까?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께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했는가 하면,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권세를 다 주겠노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세상의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느라 스데반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악마의 덫에 걸려든 악마의 노예들이요,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들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한 악마의 얼굴들 뿐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참 된 그리스도인은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천사의 얼굴을 지닌 자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천사의 얼굴을 지닌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악마의 얼굴을 지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돈 주머니나 세상의 것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결연히 진리를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대체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까? 부족한 종도 어제 밤에 벧엘 전에서 설교를 준비하면 한 없이 울었습니다. “안 목사 너도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가? 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물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죄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는 천사의 얼굴인데 세상의 작은 이득 앞에서는 악마의 얼굴로 돌변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침에는 천사의 얼굴로 집을 나서지만, 밤이면 악마의 얼굴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까?
상황과 여건에 따라 천사와 악마의 경계를 끝도 없이 넘나들면서, 그로 인한 선한 양심의 가책과 신앙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시간, 성령 충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분께 맡길 때, 더 이상 우리는 어두움에 속한 인생이 아니라 진리의 빛에 서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담대히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으로 산 것은
3.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행7: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우리가 왜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없는지 아십니까 ? 우리가 너무 세상의 것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둘러선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돌을 바라보기 보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돌이나 살기가 등등한 제사장들이나 공회원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 볼 때 그 마음에는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했으며 그 얼굴은 곧 천사의 얼굴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 삶이 힘들 때일수록 더욱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아무도 내게 관심 가져주지 않을 그 때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다. 무의미한 눈빛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시선을 집중하여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8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사도행전 6,7장을 보면 스데반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충만하다'는 단어는 '흘러 넘친다'는 뜻입니다. 컵에 물이 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부어서 물이 철철 넘치는 겁니다. 시냇물에 가뭄이 들어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겁니다. 스데반은 흘러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그에게 쏟아 부어졌던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그가 날마다 발견했던지 그의 삶 속에 은혜가 충만했다고 얘기합니다. 그 은혜의 깊이가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니까 그의 시선은 항상 주님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은혜의 창고?를 갖고 계십니다. 그 창고에 은혜를 가득하게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시31:19절에?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103:8절에?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여기 보세요.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 집사는 돌로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돌을 던지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합니다. 스데반이 주님을 바라보며 외친 그 한마디의 기도가 사울을 바울로 바뀌어지는 전환점이 된 것을 아십니까?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향해 전혀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그 기도의 열매가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바울입니다.
스데반 순교를 계기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고 빌립을 통하여 에티오피아에 복음이 들어가고 사울이 회개하고 그 후 복음이 확장되어 퍼져 나갑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주어진 현실의 암담함에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주어진 암담한 현실을 사용하여 미래를 여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기 기독교에 상당한 손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어진 핍박은 기독교에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핍박은 기독교의 확장으로 세계화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변화 된 그 한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가 오래 살았던 짧게 살았든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스데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 앞에 부름받은 나의 삶이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정말 작은 예수가 되어서 내 가정부터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어느 날 피곤에 지쳐 돌아온 아빠에게 6살난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천국이 어떤 곳이야? 진지하게 묻습니다.” 아빠가 말합니다. “우리 집이 천국이야” 아이가 고개를 끄떡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제 직장이 좀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 교회가 여러분의 한 사람 때문에 주변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되지 않습니까?
천사의 얼굴로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는 제자의 삶을 살기에,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늘 얼굴이 빛납니다. 그 얼굴에 주 예수의 빛이 저 태양보다 더 빛이 납니다. 오늘 당신이 이런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