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님께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문제없는 교회는 없을까요? 저는 문제 없는 교회에 나아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문제없는 교회를 찾지 못해서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 스펄젼 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보게 젊은이,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네. 만일 자네가 그런 교회를 찾는다면 자네는 절대로 그 교회에 나가지 말게. 자네가 그 교회에 들어가면 금방 문제 있는 교회가 되고 말 걸세.”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문제가 많은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교회도 문제가 왜 없겠어요? 많이 있지만 그 문제마져 은혜로운 마음으로 보면 좋은 교회로 보이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목사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까?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어떤 집사님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 마음에 은혜가 사라지니까 문제가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문제없는 가정과 교회도 없습니다. 본문의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성령이 충만했던 교회요, 날마다 부흥한 교회요, 사랑이 넘쳤던 교회입니다. 얼마나 사랑이 넘쳤는가? 성도 가운데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성도에게 나누어주었어요. 얼마나 부흥되었는가? 한 주일에 3천명이 등록하는 놀라운 교회였어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그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사도행전은 지적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면 부흥하는 교회 안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분열과 원망의 문제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되는 가운데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고향에서 그대로 살아온 히브리파 유대인들이며, 그들은 히브리말을 썼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유대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사람들도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사람들은 언어가 달랐는데, 헬라 말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히브리말은 그냥 알아들을 정도지 잘 말하지는 못했어요. 그들의 생각은 로마 사회에 젖어 있었어요. 로마 정치에 완전히 물이 들었던 겁니다. 그들은 굉장히 개혁적이었습니다. 율법을 고수하기보다는 좀 더 개혁적인 생각을 가지고 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서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모였으니 어떻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여러분, 원망은 무서운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왜 멸망했는지 아십니까? 원망때문에 멸망한 겁니다. 원망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늘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가서 차라리 불평을 한다면 그 일이 개혁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고 저 뒤에서 속삭입니다. 한두 사람이 알고 또 얘기하다보면 모든 인생이, 그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사도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게 보이는 겁니다.
6장의 문제가 작은 문제 같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지금 굉장히 큰 문제에 봉착하였습니다. '원망의 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멸망시켰던 직접적인 원인, 그 원망이 점점 밑에서부터 자라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이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발생한 문제를 어떠한 태도로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가 찾아올 때 과연 어떻게 그 문제의 언덕을 넘을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은 몇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1. 일을 중단하는 것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갈등은 일을 안 하다가 일어난 문제가 아닙니다. 실컷 일을 하는 데 상대방에서 불만을 터뜨릴 때, 죽도록 헌신한 사람 편에서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여기 원망하다는 말은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원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의미는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당사자가 모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알아지는 것입니다. 이 때 오는 살망감과 상처도 참 큽니다. 교회 봉사를 하다보면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봉사를 그만두는 겁니다. 성가대, 교사, 집사, 목장지기, 어느 직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가 찾아올 때 가장 쉬운 것은 사표 던지고 떠나가는 겁니다. '집사 안 할란다! 여전도회 그만 할란다!'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요, 우리가 보통 쓰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은 갈라서는 겁니다. 형제간, 성도 간에도 교제하다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럴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로 교제를 안 하는 겁니다. 형제 관계를 청산해버리고 사는 동안 얼굴을 맞대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 다니면서도 1부와 3부로 다닙니다. 얼굴을 부딪히지 않고 말을 안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그것은 포기이므로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끊임없이 문제를 통해 우리의 일을 중단하게 만듭니다. 과거 역사를 봐도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이 작은 문제 때문에 중단되었습니까? 사탄은 이것을 노립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희생했는데 이것밖에 돌아오지 않는구나!"하고 우리 마음속에 나쁜 생각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중단해라! 그만 두어라!'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 문제 때문에 과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셨던 중요한 일을 중단한 적은 없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아름다운 관계를 포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요? 부모와 자녀관계, 부부관계, 며느리와 시어머니,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그 아름다운 관계를 단절한 채로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문제의 해결에는 수고가 따르고, 고생이 따르고,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수없이 다가오는 문제의 언덕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포기가 아닌 해결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문제로 말미암아 일을 중단하는 일이 여러분 일상사 가운데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초대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다움을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을 분담했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4절 말씀에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하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교회가 해야 될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초대교회가 해야 할 일을 정리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케리그마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음에는 디아코니아였습니다. 봉사입니다.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봉사, 과부를 구제하며 심방하는 것도 봉사입니다. 그 다음에 코이노니아, 교제입니다. 한국말로는 이 코이노니아를 번역할 단어가 없습니다. 교제 이상의 심오한 뜻이 코이노니아에 있습니다. 다 중요한 일이고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끼리 그룹끼리 만나서 얘기도 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섬겨야합니다. 그러나 이 많은 문제 앞에서 사도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사역에서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본문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구제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은 일곱 사람을 뽑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자신들이 해오던 일을 그들에게 맡깁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들만이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오늘날로 말하면 평신도들에게 맡겨버린 겁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 일곱 사람의 이름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 헬라식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누가 불평을 합니까? 헬라파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쌀을 다 가져가고 왜 우리는 쌀을 잘 안 주느냐'라는 헬라파 사람들의 원망이 생기니까, 사도들이 모여서 일곱 명을 뽑아 쌀 나누는 일을 다 맡겼는데, 히브리 사람에게 맡긴 것이 아니고 헬라파 사람에게 다 맡긴 겁니다. 엄청난 양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양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작은 소견에 사로잡히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이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래서 싸우고 다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좀 더 크게 생각하면 싸울 일이 전혀 아닙니다. 무엇으로 하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선한 일을 하자는 데 마음에 모아지면 아무런 문제없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조금만 서로 양보하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서로가 행복하게 교회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양보하지 않고 자기의 의견만이 옳은 것처럼 주장하면 다른 사람이 죄다 틀린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조금만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교회를 위하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왜 다툼이 일어나고 서로 등을 돌려야 합니까? 그러나 그냥 양보한 게 아닙니다. 여기엔 분명한 질서와 균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읽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교회의 일군을 세우는 기준은 세상의 자격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일단 학벌이 중요합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그러나 교회의 일군은 그것을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재산의 유무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의 일을 힘 있게 하려면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제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력을 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많이 했느냐가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12제자가 오늘날 면접시험을 쳤다면 한사람도 합격할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학력, 경력, 재력,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시고, 세상을 뒤집는 놀라운 일군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섬기는 일입니다. 정말 진심으로 잘 섬기기 위해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실 남을 섬길 때도 나 자신을 위해서 섬기지 않습니까? 친구들 밥 사줄 때 정말 그 친구 봐주는 마음으로 밥 삽니까? 일종의 투자입니다. 내가 두 번 사면 이 친구는 한 번 사겠지. 이렇게 하면 이미지가 살아나겠지. 속 좁다고 얘기하지 않겠지. 그런 마음으로 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들은 내가 섬김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나 이상으로 대우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겸손하게 섬겨 나갑니다. 그렇게 끝까지 섬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영혼이 구원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끝까지 섬기는 사람, 남다르게 섬기는 사람 보면 개인 생활이 영적으로 교제가 계속 이루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의지나 주위의 시선, 자기가 가진 어떤 신념으로 섬기다가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위기 앞에 오래 못 갑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사람은 그 순수함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혜로 번역된 소피아스의 원형 소피아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진리를 활용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이나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지혜입니다. 지식의 많고 적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야 할 때와 멈춰서야 할 때, 붙들어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사랑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것,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위에 있어야 할 것과 아래 있어야 할 것에 대해 분명한 질서를 깨닫는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식과는 연관성이 있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세 번째 자격은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집사는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고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마5:16절에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칭찬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욕보이고 예수님을 욕 먹이며 교회의 전도문을 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주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초대교회를 섬길 집사로 세워지니 다툼과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잘 세워야 합니다. 우리 다 부족하지만, 초대 교회가 사람을 세울 때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모습처럼 섬기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우리 교회도 임직자를 세우기 위해 오늘 발표를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우리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높은 곳을 쳐다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늘 영광의 보좌가 당신의 자리임에도 그곳을 바라보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낮고 천한 곳을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당신이 다가가서 보살펴주고 돌보아주어야 할 곳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랬기에 주님은 영광과 명예와 부귀영화가 주어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그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올라갈 자리를 바라보며 삽니다. 내가 내려가야 할 자리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부귀영화가 주어진다고 유혹하는 유혹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남들이 칭찬해 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남들이 내가 수고하고 열심히 일한 것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올라가고 싶은 자리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말은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이 주님을 닮아가지 않으면 그를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님의 섬김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는 무릎을 굽힐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무릎을 굽힐 수 있어야 하고, 자만과 자존심의 무릎을 굽힐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낫다고 하는 오만의 무릎을 굽힐 줄 알아야 하고, 내 스스로 낮아지고 싶어 하지 않은 명예욕의 무릎을 굽힐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건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이 진정으로 존귀한 분이심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니까 7절에 놀라운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첫째,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제자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말씀 앞에 회개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으로 화답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둘째, 제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숫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부흥이 임하자 교인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셋째, 형식적인 제사에 매달렸던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이 말씀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를 중심으로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배를 채웠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성령이 임했습니다. 지금까지 마른 땅처럼 강퍅했던 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일군이 많아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파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선한 믿음의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변화되면 다른 사람도 변합니다. 내가 성령충만하면 다른 사람도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지혜로워지면 주변의 사람도 지혜롭게 됩니다. 내가 칭찬받는 자가 되면 주변의 사람들도 칭찬받게 됩니다. 내가 바로 그 선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