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절망, 정말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어어 질 때 평소에는 늘 가까이 계실 것 같았던 그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 주변에는 그토록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이토록 멀리 계시는 가, 하는 그런 상실감과 외로움이 우리 마음속에 찾아 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마음이 밀려 올 때 우리는 삶의 의욕과 기쁨을 마음이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을 할 때,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멍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계속해서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납니다.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그분이 고아와 과부처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어쩌면 우리 인생은 버림받은 인생이 아닌가 어쩌면 고아처럼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과부처럼 위로도 받지 못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명절이 되고 수많은 사람이 이 세상은 마치 즐거움과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여 질 때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더 외롭고 더 세찬 외로움의 추위가 파고들게 됩니다. 그처럼 떠난 가족의 빈지라가 크게 다가옵니다.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여전히 회복 되지 않는 문제가 짓누를 때, 짓누를 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오늘 본문을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수고스럽게 아이를 낳았으면 그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임신기간 동안에 충격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남편이 임신한 아내를 버렸든지 혹은 세상을 먼저 떠났든지 우리는 다양하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그 이름이 항상 자기 뇌리 속에서 불길한 생각을 갖도록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이 이름대로 살아야 될 팔자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이름 때문에 평생 고생하다가 인생을 끝낼지 모르겠다.' 하는 어떤 불길한 생각이 계속 그를 사로잡았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의 눈앞에 있는 환경은 그리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을 보면 넘어야 될 산들이 첩첩산중이고 자기 이름은 불길하게 고통이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베스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성경에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굉장히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원뜻은 '부르짖는다. 소리를 지른다'는 뜻입니다. 야베스가 왜 갑자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한번 부르짖어야 되겠다. 하나님의 옷깃을 붙들고 좀 매달려야 되겠다.'고 절박하게 느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문제를 앞에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는 나에게 고통을 물려주었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그런 바람이 아닙니까?
오늘 이 본문을 여러분의 이야기로 읽어보십시오. 며칠 전에 저의 친구인 이수구 선교사님과 점심을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젬이라는 일본인 선교 단체를 맡아서 수고를 하는 분입니다. 저를 만나기 전에 일본에서 특히 동경 지방에 각 교회를 돌아보고 일본에서 제일 큰 교회인 요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인천 공항에 도착을 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자기의 딸이 자살을 하려다 미수에 그쳤고 지금은 정신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 여러 지역을 다미며 복음을 전한 자신에게 한국에 도착을 하자마자 들려 온 소식이 딸에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 미수에 그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혼란스러움이 일어났겠습니까?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그분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 그런 고통과 상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옆문을 열고 그 뒷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그도 진한 고통과 아픔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언지 아십니까? 우리가 의외로 이 고난, 이 고통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에게 탄식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생활 때문에 오는 부부간의 상처, 자식 때문에 오는 상처, 그리고 고부간의 갈등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사람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 그 고통으로 그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리는 분은 안계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지금 야베스는 자신의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여기 ‘복을 주시려든’이라는 말씀은 예전에 보던 개역 개정에는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이 없습니다. 우리말에는 '좋다 - 더 좋다 - 정말 좋다'로 표현하며, 영어에는 'Good - Better - Best' 이런 식으로 비교급과 최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최상급의 표현을 '복에 복을 더하사' 또는 이사야 6장에 '거룩 거룩 거룩' 즉, '최고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란 뜻입니다. '복에 복을 더하사'라고 야베스가 한 기도는 어머니는 나에게 고통을 물려주었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그런 바램이 아닙니까?
구약성경에서 복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는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라는 단어로 구약에만 415번 정도 쓰였습니다. [바라크]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축복하시거나, 신적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줄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들의 선행, 즉 착하고 복되게 살든 말든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인해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그 다음 [아시와르]가 구약성경에만 44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아시와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인해 복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바라크)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얻을 수도 혹은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복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베스가 울부짖는 복은 바로 바라크의 복입니다. ‘나 비록 부족하지만, 내가 나를 생각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는 목하지만, 내 행위로는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마치 세리처럼 하늘을 향해 가슴을 치며 복을 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베스가 지금 구하는 복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나의 행위와 상관없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구원 사건과 은혜의 사건을 날마다 경험하십시오.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성도는 은혜로 삽니다. 그것이 바로 복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우리의 실력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푸셔서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과거나 제자로 살 때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아도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한마디로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5:10)”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어떤 인물이든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니면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었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역사들이 그들의 삶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복의 힘입니다.
은혜란 내가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을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독특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면 힘이 듭니다. 봉사를 어떻게 내 힘으로 하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순교를 한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순교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시고, 하늘의 소망을 붙들어 주실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목회도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은혜를 줄 수 없습니다. 이 은혜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먼저는, 야베스는 자기의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복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역이라는 것은 현재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말합니다. 내가 속한 가정,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이것이 나의 지역입니다. 사실 이 지역에 복을 나누는 것도 어찌 보면 벅찬 일입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나의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비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지역을 넓히라는 명령입니다.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행 1:8에서는 예언을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지게 될 것이고, 또한 그 비전을 향해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도 항상 넓히는 비전을 가지고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민사를 살펴보면 19세기 말 만주로 그리고 연해주로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158개국에 700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구 비율로 계산해 볼 때 세계 그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5천년동안 좁은 한반도에 갇혀 살던 우리 민족이 불과 130년 만에 획기적으로 그 지역을 넓혀간 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민 역사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복을 주셨고 그 복을 나누기 위해 우리 민족이 꾸준히 지역을 넓혀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적으로는 우리가 이 자양동 골짜기에 갇혀있어서는 안 됩니다. 광진구, 서울, 한반도를 넘어서 저 중국으로 북한으로 5대양 6대주로 복을 나누기 위해 지역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 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은 비전을 품고 마음에 그 지역을 넓히십시오. 사업하는 분들은 비전을 품고 그 지역을 넓히십시오. 주의 사역을 꿈꾸는 분들은 비전을 품고 그 지역을 넓히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여러분들의 삶의 지역이 넓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베스는 우리에게 소중한 기도의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원망과 절망의 자리에서도 기도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복된 자리로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로 새롭게 빚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전을 품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을 나누게 하시고 또한 지역을 넓혀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야베스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셔서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자기가 간구하는 복과 자기의 지경이 넓혀지는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복을 만들어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노력으로 지경을,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무력과 술수 그리고 노력 등으로 이루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복의 허무함과 스스로 만든 영향력이 가지는 한계를 보았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이루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헛된 것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더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야베스에게 쉽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야베스가 고백한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묘사하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요단강 속에 있던 열두 돌을 취하여 기념탑을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이는 홍해와 요단강을 ‘여호와의 손이 도우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즉, 야베스는 주의 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인간 스스로 했을 때의 실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나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를 붙들지 아니하면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나이다.’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 9절 상반 절을 보세요.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고통의 자리에서 귀중한 자로 불림 받은 이 엄청난 신분 상승이 야베스에게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여기 10절 하반 절에 이렇게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의 운명이 바뀔 수 있어요. 지난 세월 동안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년 한 해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숙명과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고 체념하고 살아갑니다만,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떻든, 어떤 부모를 만나 불행하게 자라왔든, 어떤 남편을 만나 결혼했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숙명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할 때입니까? 우리가 입을 열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입니다. "주여, 나를 복 주시옵소서! 내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여러분, 인생이 왜 소중합니까? 단회성 때문이 아닙니까? 한번 지나간 인생은 영원히 돌이키지 못합니다. 이왕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십자가의 보배 피로 여러분을 구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면, 왜 인생을 그렇게 값어치 없게 끝내시렵니까? 썩어질 돈만 위해, 세상에 제대로 영적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렇게, 그러한 것을 쫓다가 여러분의 생을 끝내시겠습니까?
자!! 우리가 주의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내게 당면한 어떤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주목을 해야 합니다. 고통이 나를 무너지게 못할 것입니다. 환란이 내 인생을 휘감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야 말로 내가 이 땅에 살아갈 때 삶의 의미를 알게 하는 현장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목표를 갖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받은 복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야베스의 기도를 뛰어 넘는 더욱 위대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복을 구하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구하되,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멋진 교회의 사역자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를 더 힘있게 지기 위하여, 복을 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2017년 한 해 동안 드림으로 말미암아 2017년 마지막 주일날,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내 지경을 이렇게 넓혀 주셨어. 나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어. 주의 그 손이 나를 지켜 주었다!" 이런 간증을 서로 나누는 귀한 동성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