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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9 다음세대 - 믿음의 사람들로 키우자!! (삼상17:41-4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01-29 | 조회: 1275


지난 화요일 교역자 몇 분과 충청남도 당진에 있는 한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성장이 안 되고 힘든 시절에 교회 학교 학생들이 2000명이 모인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구정을 앞두고 심방은 아무래도 부담이 될 것 같아서 큰 마음을 먹고 다녀왔습니다. 시골인데 우리처럼 지하철이 있습니까? 거기에 가는 수단은 자가용이 유일한 수단인데 화요집회에 300여명의 젊은 여성들이 본당에 나와 집회를 하는데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담임 목사님과 점심을 함께하며 느낀 것은 다음세대를 바로 세울 때만이 미래 교회 미래 한국이 있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습니다. 다음세대에 이야기는 아무리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 동성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다음세대를 어떻게 교회가 감당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요즘 보세요. 우리의 미래라고 하는 다음세대의 모습을 보면 매우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리 젊은이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에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장애물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때로는 그 앞에 주저앉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 청년들에게 너무 익숙해진 단어가 바로 포기라는 단어입니다. 참 충격적인 단어는 7포 세대라는 단어입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되지 않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면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연애와 결혼과 출산, 그리고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에다가 꿈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일한다 하더라도 겨우겨우 오늘을 버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면 여기에 무슨 희망과 미래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 앉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앞으로 살아갈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불레셋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엘라 골짜기'라는 말의 뜻은 '상수리나무의 골짜기'란 의미로 당시 그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한 곳입니다. 당시 주변이 사막과도 같은 광야인데 이렇게 나무가 우거졌다는 것은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겉모습뿐이지, 그 속에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깔린 현장입니다. 이 골짜기에는 팽팽한 힘의 대결이 있었고, 40여 일간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었습니다. 거기에는 증오의 힘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힘이 있었습니다. 불안과 죽음의 힘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블레셋과의 전쟁이 치열했던지 이스라엘 왕인 사울 왕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 할 정도였지만,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계속 밀리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군대에 전쟁에 능한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골리앗입니다. 그는 신장은 283cm입니다. 머리에는 놋투구, 가슴에는 작은 철편들을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붙여 만든 갑옷이 있었습니다. 다리와 종아리는 놋쇠로 만들어진 갑옷이 싸고 있었고, 어깨에는 언제고 던져 찍을 수 있는 단창 통이 얹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입고 있는 갑옷 무게만 57Kg이었고, 창 무게가 7Kg에 달했습니다. 골리앗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내 인생 한복판에 이런 골리앗을 만난다며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상황 앞에 세 종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자신에게 있는 힘을 주어진 기회에 사용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찾아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골리앗을 앞에 두고 사울 왕은 백성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리라..” 이제 이스라엘에 사는 그 누구라도 골리앗만 꺾을 수 있다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고,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새롭게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귀족으로 살았든지, 아니면 평민으로 살았든지 관계없습니다. 설혹 그 사람이 종이나 노예로 살았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바뀔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그들이 골리앗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골리앗과 싸워보기나 했습니까? 아니면 골리앗을 향해 고함이나 한번 질러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번도 골리앗과 싸워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단지 거인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거인을 보고 자기 자신들을 보니까 그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골리앗 앞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용기를 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2. 비판하며 용기를 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분노합니다. 그래서 굳은 결심을 하고 골리앗을 물리치러 나가겠다고 사울에게 자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용감한 결단을 내린 다윗에게 그의 장형 엘리압은 분노에 찬 질책을 합니다. 28절에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 17:28). 믿음의 결단을 내린 막내 동생 다윗에게 격려하고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는 화를 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요, 이것이 마귀의 시험인 것입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며,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부흥의 조짐이 보이려는 곳에서는 마귀의 극심한 방해가 있을 것임을 예상해야 합니다. 부흥하고자 할 때 방해자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 형제, 내 자매, 내교회 안에 있는 동역자들이 방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그것을 방해하고 막았던 것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러나 부흥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옳지 않은 일을 하고 부당하게 방해하는 사람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와 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방해받는 사람과 시기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명심하십시요.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엘리압의 공격이 있을 때 이기는 유일한 길은 참는 것입니 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엘리압하고 싸우기를 원합니다. 엘리압하고 싸웠다면 이겨도 문제요, 져도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엘리압을 이겼다면 도덕적인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형이 잘못했어도 형 때린 동생을 칭찬하는 문화는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졌다면 골리앗과의 싸움에는 나가 보지도 못하고 온 힘을 다 쏟아부어 탈진 상태가 되어 골리앗과의 싸움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살펴보면 많은 교회가 골리앗과는 싸움도 해보지 못합니다. 밤낮으로 교회 안에 있는 엘리압과의 싸움을 벌이느라고 탈진해 버립니다.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싸우는가는 더 중요합니다.

 

 

3. 주어진 힘을 남을 살리는 일에 당당하게 도전하는 사람입니다.사울 왕은 삼상17:37을 보면 사울은 다윗에게 골리앗과 싸우러 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삼상17:38에 보면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혔습니다. 얼굴이 붉은 소년, 소년이 용사와 싸우러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울 왕이기에 군인처럼, 장수처럼 만들어주려고 옷과 투구, 갑옷을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에게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다 벗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불편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임금님의 군복이고 임금님의 투구입니다. 그러나 그 맞지 않는 임금님의 옷에 집착할 수 없습니다. 익숙하지 못한 옷으로 전쟁에 나가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40절을 보세요.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諸具)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은 그 당시 목자들이 양을 칠 때 필요했던 가장 기본적인 것만 갖추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대개 세 가지 정도를 항상 준비하고 다녔습니다. 제일 먼저 동물 가죽으로 만든 가죽 부대(scrip)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구,' 즉 가죽 주머니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이 가죽부대에다가 빵이나 마른 과일과 올리브 혹은 치즈 등의 음식을 넣고 나녔습니다. 그 다음에 물매(sling)를 들고 다녔습니다. 이 물매는 가죽조각으로 만든 새총 같은 것이었는데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작은 돌멩이를 말아서 던지는 공격용 혹은 방어용 무기였습니다. 목자는 또한 나무로 만든 작은 곤봉형의 막대기(staff)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막대기의 끄트머리에는 여러 개의 못이 박혀 있었으며 위쪽 손잡이에는 대개 작은 구멍이 나 있어서 가죽끈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바로 이 가죽끈으로 막대기를 목자의 허리춤에 매달아 놓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했던 것이지요. 어쨌거나 목자는 이 막대기를 가지고 양을 습격하는 이리떼나 약탈자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 牡�은 그 당시 보통 목자들이 양을 치기 위하여 늘 준비하고 다녔던 기본적인 물건들만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중무장한 상대편 장수가 볼 때 어린애 장난 같은 양치기 물건들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겼습니까? 17: 48-49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行伍)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최고의 신예 무기로 완전무장했던 거인 장수 골리앗이 물맷돌 하나에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골리앗이 온통 구리로 만든 무기들로 무장했다고는 하지만 가릴 수 없는 급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마였던 것입니다. 그 이마 하나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다윗의 조약돌 하나가 그 이마를 쏘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훌륭한 무기 하나 써보지 못한 채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그 어떤 창칼도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갑옷과 투구와 단창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두 가지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다윗이 사울의 군복과 놋투구와 갑옷을 입고 사울의 칼을 찼지만 불편했다는 말씀을 읽고서는 무릎을 쳤습니다. , 다윗은 다윗이 되어야지 사울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구나! 다윗이 사울의 흉내를 내서 사울의 무기를 가지고 골리앗과 싸웠다면 틀림없이 졌을 것입니다. 왜요? 어린 다윗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무기가 사울에게는 맞았겠지만 다윗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처럼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다윗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다윗은 다윗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아갈 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번 특새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십니까?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물으신 것처럼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지 말고 과연 동성 교회를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을 알 때 힘이 생기고 희망이 생깁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신장으로 보나 무기로 보나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이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왜 다윗이 이겼습니까? 골리앗은 제 힘만 믿고 날뛰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원리입니다. 제 힘만 의지하면 집니다. 마틴 루터가 작사한 찬송가 585장의 2절 가사처럼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업습니다. 그러나 날 대신하여 싸우시는 불패의 장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상대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삼상 17: 45을 보십시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얼마나 위대한 선언입니까? 진정한 승리는 외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무기에도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물맷돌 하나만 가지고서도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모습 이대로 나아가되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 그대로 나아가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거대한 사탄이요 무서운 적()그리스도인 골리앗에게 나아가면 우리는 백전백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의 힘 때문에 승리할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는 다윗 같은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들이 허다하고 하나님의 군대를 업신여기는 세상의 거인들이 큰소리를 치는 판이라 할지라도 그때 두려움 없이 서는 사람,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을 키워야 합니다. 내 평생의 기도는 쓰임 받게 하옵소서입니. 위기의 때, 굴욕의 때, 무너짐의 때라 할지라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쓰여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 자녀를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 동성교회 성도 모두가 이런 자녀를 키워 낸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다윗을 키워내는 다윗 학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자녀를 통해 예수의 나라가, 복음의 나라가 왕성해지고 강하여지도록 양육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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