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50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올해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년이 되는 해가 됩니다. 그는 꿈 많은 법학도 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들판을걷다가 자기 앞에서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꿈찍한 모습 앞에 한 동안 방황을 합니다. 22살에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구원의 문제입니다. 그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수도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죄의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24살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미사를 집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었음에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신학교 교수가 되어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음에도 역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베텐베르그 대학 정문 게시판에 로마 천주교가 잘못 행하고 있는 것을 반박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한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도대체 자신의 구원의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청년이 어떻게 거대한 천주교를 향하여 맞살 수가 있었습니까?
이와같은 엄청난 일은 그가 롬1:17절을 읽다가 그 한 구절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하거나 금식이나 수행과 같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란 슬로건으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뿐만 아니라 당시 타락한 천주교를 벗어나 ‘개혁교회’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일어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문이 활짝 열리는 해’로 지난주에 이어 오늘 ‘말씀의 문이 열리는 해’가 되기를 갈망해서 본문의 말씀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 볼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초대교회 중에서도 매우 특별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1:6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2:2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2:14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에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특히 2:2절 상반 절에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노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도대체 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바울은 이렇게 감격에 찬 모습으로 감사를 고백하고 있나요? 사실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항상 빚진 마음을 가진 교회입니다. 행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2차 선교여행 시에 약 3주 동안 머물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 동안 성경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길어야 한달 남짓한 정말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증거된 그곳에 고위층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릅니다. 정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이 데살로니아 지역까지 와서 엄청난 방해를 합니다. 그들은 불량배를 동원하여 야손에 집에 있던 바울 일행을 끌어내려고 침입을 합니다.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가서 소리를 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 왔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입니다. 로마의 황제는 곧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절대적인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로마의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즉 왕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반역을 도모하는 자들로 여겨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을 들은 그 지역의 무리와 유지들이 소동을 일으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야반도주를 하여 뵈뢰아로 갑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입니까? 불과 3주의 짧은 기간 동안 제대로 증거도 못한 채, 마치 광야로 피신한 만삭이 된 여인이 아이를 낳고 탯줄을 짜르고 아이를 광야에 내두고 간 그런 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불량배까지 동원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극심한 핍박을 했던 데살로니가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 에만 들릴 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향한 그 교회의 믿음에 대한 소식이 광진구 지역 뿐 아니라, 서울과 전국에 널리 퍼져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이 닮아가려고 하는 믿음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후8:1절부터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자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와 이 교회 속한 성도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살전 2:13을 보십시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무엇을 감사해 하고 있습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 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이는 여기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잠시 복음을 증거 했지만, 이들은 그 말씀을 붙잡고 삶에 적용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열매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생활의 3각대와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겸비되어 있습니다. 같이 해볼까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 세 가지의 특징으로 인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본이 되는 모델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동성교회가 모든 사람들이 닮고 싶은 교회, 부흥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이방인들로 예수를 영접한 초보 성도들이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이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단어보다는 역사(work of faith)를 강조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를 의미합니다. 믿음에는 살아서 역사하는 산 믿음이 있고 죽어서 역사하지 않는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 있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짧은 복음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아 믿음의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철병거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을 차지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물맷돌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승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에 스치기만 해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님을 만졌을 때 혈루의 근원이 마르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치실 때 항상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믿음의 크기만큼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현실의 장벽이 높다할 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길이 뚫립니다. 지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다른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인생의 위기가 오고, 고난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믿음의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가 임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 있는 교회는 반드시 사랑의 수고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 역시 거짓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수고’를 영어로는 ‘labor of love’입니다. ‘labor’ 라는 말 속에는 ‘수고’ ‘노동’이란 뜻과 함께 아기를 낳을 때 겪는 산모의 ‘산고’와 ‘진통’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참 사랑에는 아기를 낳고 아기를 기를 때 엄마가 지니는 ‘산고’와 ‘진통’과 ‘수고’를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사랑의 수고와 사랑의 산고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믿음의 역사 위에 사랑의 수고가 나타날 때 일어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힘이 아닙니다. 무기가 아닙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갈 수 없는 곳에 가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의 노래도 많고, 드라마도 많고, 가슴 찡한 사랑의 시도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 인스턴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희생입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랑은 감각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조건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생적 사랑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은 수고해야 합니다. 엄마 아기를 출산하면 어떻습니까? 사랑의 수고를 합니다. 처녀 때는 수줍고 부끄러움이 많던 분도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열고 젖을 먹입니다 더러운 것 쳐다보지도 못하던 사람이 아기의 변을 직접 만지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봅니다. 걸레한번 빨지 않던 사람이 변이 묻은 옷을 빱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수고가 없는 사랑, 희생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인내’를 가졌습니다. 소망과 인내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항상 함께 갑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에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합니다. 제임스 와트의 『소망』이라는 명화는 한 소녀가 지구 위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앉아서 한 줄뿐인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 남은 한 줄은 『소망』입니다. 인맥도 끊어지고, 학맥도 끊어지고, 혈맥도 끊어진 절망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늘로 연결된 마지막 소망의 줄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줄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감옥 속에서도 소망의 줄을 끊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줄을 끊지 않았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광풍 가운데서도 소망의 닻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을 기다리면서 소망을 가졌기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 우리에게 천국을 예비하신 주님 아들을 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기 않겠느냐? 이 소망으로 견디시기 바랍니다. 욥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영광을 보면서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통해 주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 희망을 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큰 도전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사역을 했지만, 데살로니가교회는 아주 짧은 역사를 지닌 어린 교회였지만, 그 교회는 데살로니가라는 한 도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 교회는 예수 믿는다고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결코 식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다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소문이 마게도냐 지방 뿐 아니라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그 교회 성도들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장은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들의 이야기도 나누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선포되고 나누어 질 때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똑 같은 말씀을 받는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고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 일까요? 문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가지 마음 밭을 이야기하신 이유입니다. 씨는 같아요. 그런데 밭이 달라요. 길가도 있고, 돌짝밭도 있고, 가시밭도 있고 그리고 좋은 땅이 있었습니다.
눅8:15절 보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을 신실한 마음을 잘 듣고 순종할 뿐 아니라, 인내가 꼭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데살로니가 인들의 마음 밭이 좋은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짧은 시일에 좋은 결실을 거두게 한 것입니다. 살전2:13을 보십시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무엇을 감사해 하고 있습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 하느니라”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들의 삶의 모습은 주변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놀랍게 변화되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 따라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 위에 바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말씀 없이 이루어진 부귀영화는 사상누각 -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을 정리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여건을 주장해 주십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전혀 두려움 없이 힘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바른 신앙으로 살려 할 때 손해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지켜주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던 뉴욕시내 한 가운데에 살고 있는 백인 친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두 친구가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시내의 시가지를 걷고 있었는데, 인디언 친구가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이런 시내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음 가운데서도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겁니다. 그때에 백인 친구는 ‘야! 이 뉴욕 한가운데에 무슨 놈의 귀뚜라미 소리야?’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인디언 청년은 친구를 따라와 보라고 하더니 길모퉁이에 있는 넝쿨로 된 집의 벽 틈에서 귀뚜라미를 찾아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사람들은 영적인 귀머거리로 살고 있습니다. 돈의 소리에는 민감합니다. 욕망의 소리에는 민감합니다. 그러나 정말 들어야 할 소리에는 귀를 닫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지금 새해 첫 출발점에 선 우리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를 향하여 애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2017년 새해의 출발점에 선 우리가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기보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음성을 듣는 한 해로 살아가십시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