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박물관에 특별한 그림 한 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교(主敎)가 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성당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에서 주교가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이기에 더욱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그 그림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인 주후 4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부하 장수가 살해 당하자 잔혹한 보복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황제는 보복 명령을 철회하였지만, 이미 그곳에서는 1500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교회는 황제의 이런 끔찍한 대량학살을 엄히 정죄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성당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성당의 주교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였습니다. 중세의 성자 어거스틴(Augustinus)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위대한 분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끔찍한 학살에 대해서 탄핵하면서,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탄핵과 참회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황제가 그 암브로시우가 사역하고 있는 그 성당에 들어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정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성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저지른 죄를 참회하지 않고는 이 성당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황제는 암브로시우스 주교 앞에서 땅바닥에 엎디어 참회하고 말았습니다. 죄를 참회하지 않는 채 예배를 드리러온 황제를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암브로시우스 주교도 위대한 분이지만, 주교 앞에서 권력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땅바닥에 엎드려 회개한 황제 테오도시우스도 위대한 분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참 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황제를 예배당에 못 들어가게 하는 암부르스 감독은 그 순간 자기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황제를 막았던 것은 바로 진정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침 예배가 어떤 것인가의 진수를 맛보는 한 사건을 대하게 됩니다.
본문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웃시야가 죽던 해”라는 말 속에 담겨진 의미는 ‘온 나라 백성들이 불안에 빠져 있을 때’라는 뜻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큰 별이 떨어지고, 소망이 사라지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 유다 백성들에게 걱정스러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북쪽에 있는 거대한 나라 앗수르가 이방 나라들을 하나 둘 점령해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쪽에는 앗수르보다 더 크고 힘센 바벨론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위기상황이 닥쳐온 것입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유다라고 하는 작은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할 때, 그의 삶에 엄청난 일을 겪게 됩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답답한 마음으로 성전에 들어갑니다. 성전에 들어간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스랍들이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성전과 온 땅에 가득한 그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나오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노래한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인간의 표현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본 스랍들에게는 6개의 날개가 있었습니다. 그 여섯 날개 중에 두 개로는 얼굴을 가렸고, 두 개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맨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요, 발을 가리는 이유는 가장 더럽고 부끄러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 보좌 주변에 있는 네 생물이 계4:8절에 보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계4:8) 하며 찬양합니다. 이렇게 스랍들이 찬양하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며 집에 연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랍이 누구입니까? 스랍이 어떤 존재인지는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스랍’이라는 말은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에만 나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 2절에 소개한 것처럼 스랍은 하나님을 모시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사 중에 한 부류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쉽게 말하면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천상의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처럼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게 천사인데, 그 천사들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얼굴과 발을 가려야 합니다. 아무리 천상의 존재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신 분 앞에 서자 이사야는 주저 없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에 보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자 자신의 죄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였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하는 스랍들에 비하면 자신의 입술은 부정한 입술일 뿐입니다. 이사야는 제사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많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하나님을 뵙고 보니 자기가 했던 말들이 부끄러워집니다. 얼마나 많이 부족하게 하나님을 전했는지, 이 입술로 얼마나 많은 거짓을 행했는지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존재로 자신이 비쳐집니다. 이렇게 부끄럽고, 이렇게 초라하고, 이렇게 불결한 자신은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이사야의 모습입니다.
여기 이사야의 고백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는 죄에 대한 자신의 슬픈 탄식이 일어나는 절규의 회개의 외침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사야가 오늘만 성전에 갔겠습니까? 아마 수도 없이 예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예배에 종교적 열심 뿐이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신 지식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자신을 알 수 없다” 바로 이 말 그대로입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뒤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앞에 선 자신이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깊이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아는 몇몇 목사님 내외분들이 삼척에 있는 환선 굴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 하는데 참 많이 웃기도 하고 또 귀한 교훈을 얻기도 했습니다.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환선굴을 구경하고 마지막 지점쯤 이르렀을 때에, 옛날에 스님이 제자를 가르친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형물 앞에 사람들이 동전이며 1000원짜리 지폐를 많이 던져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이 이런 경고 문구가 씌여 있었습니다. "가져가지 마시오. 촬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난기가 많은 어떤 사모님이 스님들 앞에 돈을 던져 놓은 것이 볼상 사나워서 그랬는지 장난으로 그랬는지, 거기에 있던 1000원짜리 지폐를 몇 장 주워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양쪽 호주머니에 지폐를 넣고는 나오는데, 입구에서 관리인이 조용히 부르더랍니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돈을 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시치미를 뚝 떼고 '무슨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냐'고 반색을 하자, 모니터를 켜더니 사모님이 돈을 주워간 모습을 촬영한 것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 '이래도 시치미를 떼겠느냐'고 다그치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한 쪽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주었더니 다른 쪽 호주머니에 있는 것도 내 놓으라고 해서 양쪽 호주머니에 넣어왔던 돈을 다 돌려주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두침침한 동굴 안에서 한 행동도 다 카메라에 기록되어 변명할 수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우리의 죄가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감출 것이 없을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마치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 하더라도, 또 완전 범죄에 성공해서 아무도 자신의 죄를 눈치채기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할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그 때가 꼭 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혹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범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할 기회에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더 큰 불행과 비극이 따라올 뿐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집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함으로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식이나 부인했지만 회개함으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는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을 허무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드러내는 것은 수치'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회개를 통해서 용서의 은총을 경험했던 다윗은 시3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여기 이 처절한 자신을 내려놓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스랍을 통해서 이사야의 죄악을 씻어주십니다. 스랍이 핀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7절에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 임재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보지 못하면 아직 나는 종교인이지 참 된 성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참 된 예배를 맛 본 자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성품 속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지 않으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는 믿음의 기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보니 하나님 보다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 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에 서고 싶어 합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천한 자리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낮아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낼꼬?” ―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시는 이 부름 앞에 이사야은 이렇게 선뜻 대답을 합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왕족출신입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름에 응답하면서부터 그는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험한 선지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기꺼이 주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은 이 은혜가 너무나 황홀하기에 자신을 부르신 그 주님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바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신이 쓰여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주의 임재 앞에 선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들은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를 거부했습니다. 두벌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생을 선택하고 그 가난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 주님 붙잡고 이 땅에서 주께서 맡긴 사명을 당당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자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롬12:2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드리라.” 한 것은 “너희 자신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의 소유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의 관심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의 힘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다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예배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찬양과 기도를 받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이제는 목자로서 우리 앞에 계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시작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예배가 끝난 후 우리 손을 잡고 그는 이제 문제와 갈등이 있는 우리 가정, 직장, 우리 사업의 장, 그리고 우리 고단한 세상 광야를 함께 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이요 예배의 영광인 것입니다.세계 제이차 대전이 발발 했을 때 대영제국의 국민들은 깊은 절망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전쟁에는 승산이 없어 보였고 나치 독일의 점령은 시간문제로 예측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 에서 대영제국의 지도부는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영국이 독일을 대항하여 개전을 선언하면서 유명한 윈스톤 처칠경은 당시 성공회의 존경받는 주교이었던 윌리암 템플에게 대 국민 연설을 부탁합니다. 같은 날 대국민 메시지를 하면서 윌리암 템플은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 영국 제국의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전쟁은 큰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더 큰 일입니다. 만일 우리 국민이 이와 같은때에 진정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믿을수가 있다면 전쟁은 결코 큰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능히 우리가 예배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을 승리할 것입니다." 그 주일 영국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렸고 교회마다 예배하는 국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영국은 치열한 전선에서 버티고 견디어냈고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예배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하는 줄로 믿습니다. 다른 것은 다 실패해도 예배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우리의 심령에 생수의 강이 넘칩니다. 생수의 강이 넘치면 인생이 풍성하게 되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인생이 늘 푸르고 많은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예배하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의 봉사와 우리의 사역이 힘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우리들의 영혼이 살찌게 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배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를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배 시간부터 지키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도응답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배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주일마다 아니 예배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한 평생 이런 예배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