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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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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8 내가 왕이니라 (요18:33-3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12-18 | 조회: 1203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심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96절은 이미 이 사실을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또 이사야 714절에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사렛에 살고 있는 마리아라는 처녀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녀는 이미 요셉이라는 청년과 약혼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예언하셨던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을 위해 그녀를 택하시고 그 태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과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처녀 탄생문제는 인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사건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초월적인 신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을 만왕의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압제하고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빌립보 2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우리를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리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피를 흘리는 의인이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우리를 허물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 다시 말하면 베들레헴의 요람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갈보리의 십자가로 이끌어가는 길목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는 십자가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말구유, 예수님의 탄생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배경에 십자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둔 베들레헴의 탄생이 진정한 복음이요, 은혜이지 십자가를 모르는 크리스마스는 복음도, 은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피땀을 다 쏟는 기도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십니다. 자인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는 권력자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받으십니다. 물론 그 재판은 거짓 증언이 난무하고 불법으로 강행된 재판이었습니다. 붙잡히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 가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은 두 명이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한 명이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때 그 후임 대제사장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어 대제사장 직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서둘러 사위인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권력의 대물림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위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자신과 사위가 번갈아가며 대제사장 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대제사장은 사위인 가야바입니다. 런데 장인인 안나스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아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실세인 장인 안나스에게 가장 먼저 끌고 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려가서 또다시 심문을 받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씌워 사형을 결정합니다. 사형 결정을 내렸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권력자들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갑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가신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십니다. 이미 산헤드린 공회를 통해서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불법으로 진행된 재판이지만 어느 누구도 불법재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기 않았고, 불법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간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빌라도가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총독이라고 하면 사형집행을 명령할 수 있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사형을 요구해도 총독이 불허하면 결코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막강한 힘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로마 총독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왕이니라.”

 

37절에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왕이란 말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나에게 왕이라고 바르게 말하는구나. 사실 나는 이것을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것을 위해 세상에 왔다. 나는 진리에 대해 증언하려고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말을 듣는다.” 빌라도는 자기가 가진 권력을 자랑하며 거만하게 말하는데, 주님은 진지하게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너 권력 있어?” 하는 말이고, 예수님은 너 진리를 알고 싶으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줄을 서고 난리를 칠까요? 권력을 가지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행정고시 사법고시에 합격하려고 그렇게 죽자 사자 애쓰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권력은 현실적인 힘입니다. 권력이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왕이다무슨 말입니까? 지금 세상 권력자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참 된 왕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관객수가 1000만 이상을 동원한 영화가 10편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지난 2012년에 개봉하여 관객수 1,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관람한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전부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왕위를 둘러싼 권력다툼과 붕당정치로 인해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 광해군은 역모가 일어날 것이란 소문과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점 흉포해져가고, 자신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악몽을 꾸게 됩니다. 그래서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오도록 합니다. 자신의 대역으로 가짜 왕을 세워놓으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진 사람이 기방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 탈을 쓰고 만담을 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일을 하는 하선이라는 사람입니다. 하선은 광해군과 외모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습니다. 그에게 왕의 말투를 하도록 교육을 시켜 며칠에 한 번씩 왕을 대신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선이 왕의 교육을 받고 있던 시기에 광해군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맙니다.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역모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역모의 기회를 줄 수 있기에, 도승지는 가짜 왕인 하선에게 계속해서 왕노릇을 하라고 합니다.

 

왕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왕이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도 있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제가 큰 감동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대동법에 대한 것입니다. 실제 왕인 광해군이 나랏일을 돌보면서 가장 강력하게 시행하려 했던 것이 대동법입니다. 그런데 가짜 왕인 하선은 그 대동법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선은 대동법이 무엇인지 공부를 하게 되고, 그것이 백성들에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대동법을 밀어붙입니다. 물론 도승지를 비롯한 신하들은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하선을 가짜 왕으로 세워서 진짜 왕을 대신하게 하고 그 뒤에서 가짜 왕을 조종하는 도승지는 그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라고 말하지만, 정치를 모르는 가짜 왕 하선은 대동법을 밀어붙이고 맙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백성들에게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타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짜 왕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진정한 왕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때문에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정치가 뭔지 모르지만 백성들에게 좋은 일이라면 밀어붙이는 가짜 왕이 어쩌면 진정한 왕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대통령으로 인해 연일 시끄럽습니다. 결국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처리안이 통과 되고 이제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는 과정 속에 어느 누구하나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특히 탄핵이 되기까지 드러난 일들을 보면서 국님들은 특별히 대통령과의 친분을 앞세워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를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그룹의 총수들이 비에 젖은 생쥐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한때 비선실세로 치부하며 자기들 말 한 마디로 끌어내리고 올리는 막강한 힘을 행사했던 권력자들이 한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우리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영역에서 왕노릇을 하려 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가짜 왕 하선이 진짜 왕 광해군을 대신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가짜 왕 하선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 사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 가짜 왕들인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수천억의 국가 예산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를 정도로 권력의 맛에 찌들어 있는 진짜 가짜 왕들일 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내가 왕이니라.’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은 결코 자신의 재판에 유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증언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미란다 원칙’(Miranda rule)을 아시지 않습니까? 형사가 영장을 가지고 와서 묵빅권을 해사 할 수 있고...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빌라도의 심문에 대부분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질문에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왕이니라.’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당시에 유대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은 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재판에서 불리한 증언입니다. 내가 왕이니라.’라고 대답한다는 것이 재판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불리함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고,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틀림이 없는 불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왕이라고 말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나 삶에는 왕의 위엄이 없으셨습니다. 다른 왕들처럼 남들 위에 군림하거나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군사력을 키워 자기 나라의 영역을 지키려 하거나 그 영역을 넓히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왕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피해버리셨습니다.(요한복음 6:15)

 

그 왕으로 오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는 16: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네가 한 그 말이 정답이야!’ 그런 뜻입니다.

 

여기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에서 그리스도란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세 가지 직분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삼직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왕의 직분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그릇되고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예언자의 직분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서 백성들의 죄에 용서구하고, 상한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제사장의 직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그 세 가지 직분을 다 가지신 분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신다고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산다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지쳐 있고 힘들어할 때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셔서 위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세상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세상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깨우쳐주십니다. 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바른 길을 가도록 우리를 권고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예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 자아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어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권면하시고 우리를 그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백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왕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은 그 왕에 대해 대관식 한번 치루어 주지를 않았습니다. 다만 동방 박사의 경배와 목동들의 그 신비한 광경을 체험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눅2:14절의 말씀처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두원진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선포하고 땅에서는 그 왕을 모신 자들이 주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우리의 왕이신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사셔야 하지 않습니까?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십니까? 그러면 그 고백에 부끄럽지 않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른 믿음으로 사십시다. 주님께서 왕이신 주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왕이시라면 우리는 주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선하신 왕 우리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갈 때 우리의 모습 속에서 왕이신 우리 주님의 향기가 풍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왕이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을 봅니다 . 왕이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우리 인간됨의 존귀함을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피 흘려 주신 하나님을 봅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생각할 때마다 그분은 내게 은혜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하고, 믿으면 믿을수록 가슴이 벅차 오르고, 그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나의 전 인격이 가만있지 못하고 흥분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묵상하는 크리스마스가 됩시다. 그분에게 찬양을 돌리는 크리스마스가 됩시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놀라운 은혜 앞에 감사하는 성탄이 됩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스스로 계시면서 유한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되 종으로 오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룩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식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보내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사람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하며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성탄이 주는 은혜 때문에 우리 영혼이 소생하게 하시고, 우리 심령이 기뻐 뛰게 하시고, � 痢� 영혼의 모든 질병들이 날라가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위로를 받는 귀한 성탄이 되도록 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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