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마2:1-12. 2016. 12/10.
이제 2주후면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탄생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원래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기에 태어나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뿐이고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우리가 무슨 말로 설명을 하고, 우리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연구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 성탄의 신비는 우리의 좁은 머리로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메세지를 가리켜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 Good news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는 아기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가난의 땅 유대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소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탄생한 이 사건은 당시의 관점에서도, 오늘날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스캔달에 불과한 사건이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지구촌의 한 작은 이 마을에서 발생한 스캔달이 어떻게 인류를 위한 복음의 사건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전 1장18절에 “십자가의 도는 멸망받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구원 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엄청난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그것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의 외침이 아니라 이방인인 동방박사의 외침입니다. 이 사람들은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별이 인간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천체 연구가들이었고, 과학자들이었고, 그 사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던 사제(司祭)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하여 진리를 찾아온 것입니다. 저들은 별을 따라 와야 했기에 낮에는 방향을 알 수 없었고 밤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동쪽으로 무려 2,500Km나 떨어진 페르시아에서부터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오는 동안 사나운 맹수를 만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강도떼를 만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비와 물건들을 다 빼앗길 수도 있는데, 그들은 목숨 걸고 별 따라 왔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뭔가 묻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지금 낯선 외국인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려고 왔습니다.”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낯선 외국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헤롯왕에게도 즉시 보고되었습니다. 하여튼 이 소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헤롯왕은 즉시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빨리 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해서 예루살렘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소문으로 헤롯왕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헤롯왕은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첫 번째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지금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그는 에돔 사람으로서 로마의 권력에 편승하여 유대인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헤룻은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도 짓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세금도 감면해 주었고, 자기의 금 접시를 녹여서 백성들의 식량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유대인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을 없애기 위해 300명의 법정 위원들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를 반대하는 장모나 아들들에게도 쉽게 칼을 휘둘러 서슴없이 죽이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또 그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10명의 아내를 거느리면서,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근친상간도 서슴없이 하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기 2절에 "소동했다"는 말은 ‘불안하게 하다’는 의미로 당시 그 누구보다 헤룻에게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빨리 이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서 예루살렘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소문으로 해롯 왕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했습니다.헤롯왕은 박사들을 조용히 불러 말합니다. 7,8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왕도 아기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예언되어 온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 헤롯왕은 그분이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기 예수께 경배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왕은 겉으로는 '나도 아기 예수께 가서 그에게 경배하리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는 겉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환영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자기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2. 만왕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백성들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에 계시는지에 대하여 묻는 동방의 박사들의 질문을 듣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절을 볼까요?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여기 헤룻 왕만이 아닙니다. 여기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아니, 왕이 탄생하셨다고?”하며 온통 난리였습니다.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가면서 시끌벅적했을 것입니다.
“왕이 탄생하셨대”하며 한창 시끄럽게들 반응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호외도 뿌려졌겠지요. 9시 뉴스의 톱뉴스로 등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반응이 없습니다. 그저 한때의 소동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어디인지 몰라서도 아니었습니다. 5절, 6절을 보니까 서기관들에 의해 아기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동안 뜨겁게 반응했지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정말 백성들이 그토록 메시야를 기다렸다면 이 동방박사의 이 이야기는 소동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순간의 감정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 어느 누구도 성경에 약속된 베들레헴에 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대감이나 기쁨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동일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 탄생이 어려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내가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 구석진 곳에 있는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눅2:6-7절을 보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 저곳 찾아다니면서 빈 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 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하지만 빈 방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찬 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별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3.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첫 번 성탄절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성경학자들입니다. 헤롯은 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서기관들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성경을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사천리로 대답합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미가서에 말씀을 인용합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자! 얼마나 해박한 성경의 지식을 가졌습니까? 그러나 이들 역시 뚜껑을 여니까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성경은 잘 아는데 삶이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항상 말씀 앞에 비추어 보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헌신이 참된 신앙입니다. 여러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쩌면 알기 때문에 더 죄가 무거울 수 있습니다. 약4: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것이 선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는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까지 찾아갈 발이 없었습니다. 탄생하신 메시야에게 선물을 드릴 손도 없었습니다. 그분께 경배하려는 - 동방박사들과 같은 벅찬 가슴도 없었습니다. 오직 머리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아기 예수, 만왕의 왕이 오셨다고 했을 때, 예수를 찾아가기는 커녕 의도적으로 무관심했고 바로 이 사람들이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 또 메시야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었지, 그들이 직접 메시야를 만나지는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참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하여 진리를 찾아오는 동방 박사들입니다. 왜 그들이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왔습니까? 무슨 이유로 그들이 자신들을 헌신했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2절과 11절에 나타난 대로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했다고 할 때 우리말로 "경배하다"로 옮겨진 원래의 말은 몸을 완전히 엎드려서 존경을 표시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유혹할 때 말한 그 경배는 바로 그러한 행위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말씀하시며 그 유혹을 물리치신 일을 통해서도 그 경배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께만 향해질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경배를 받으실 분이심이 동방의 박사들의 경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배는 그 후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행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광풍과 파도에 시달리며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바람을 그치게 하시자 배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말하며 그렇게 경배했습니다(마14:3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 달려가던 여인들을 만나 "평안하냐" 물으셨을 때 그 여인들 또한 예수님께 그렇게 경배했습니다(마28:9).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도 예수님께 그렇게 경배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일을 접할 때마다 예수님께 그런 경배를 드린 것임을 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배하기 위해서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가장 귀한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황금은 보석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유향과 몰약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얻을 수 있는 향유 가운데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도중에 여비가 부족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예물을 팔기만 하면 얼마든지 넉넉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중한 예물을 절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존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 그들은 목숨걸고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꿈을 통해 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헤롯왕을 만났을 때, 헤롯왕은 "베들레헴에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고 메시야를 찾거든 돌아올 때에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꿈에 "헤롯왕에게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말씀대로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경배와 참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습니다. 만약 그들이 경배는 멋있게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왕을 만났다면 그들의 경배는 불완전한 경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오늘 성탄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하시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펴본 네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으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천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이 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모두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해서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서, 두 노인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에 징조도 없고 계시도 없이 태어나셨겠습니까? 첫 번 성탄에 주님을 만난 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계시를 받고 그것을 순종함으로 이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무지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주님을 위해 바르게 살 수 없고 바르게 헌신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의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며 예수 위해 나의 메마름 때문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사랑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제가 교회사역의 전부는 아니지만, 구제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는 일에 교회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를 세상은 거절 했지만, 우리는 생명의 빛을 마신 자들입니다. 그 주님을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 은혜 앞에 섰다면, 그 진리 앞에 섰다면,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