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 성례 딤전 3:14-15. 2016. 11/27
미국 라스베가스는 세계적으로 카지노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라스베가스에는 드라이브스루 웨딩 채플(결혼 전용 교회)가 있습니다. 매년 15만회 이상의 결혼식이 열립니다. 이 가운데 약 30%인 약 4만 5,000회의 결혼식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결혼을 올린다고 합니다. 오전 6시부터 밤 11시 59분까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라스베가스에 결혼식만을 전문으로 하는 교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계산을 해보니까 오전 6시부터 밤 11:59분까지 결혼식 한 건당 10분 밖에 소요되지 않습니다. 저도 종종 주례를 서기 때문에 예식장에서 치러지는 결혼식 주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식장에서 주례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으면 예식장 관계자가 와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다음 결혼식 때문에 시간이 촉박합니다. 빨리 좀 끝내 주세요.” 그럴 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랑신부에게는 평생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날인데, 결혼식장에서는 돈만 벌면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빨리 해치우고 싶어 하는구나.’
그런데 라스베가스 한 교회당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 10정도 결혼식을 올린다면 그건 결혼식장보다 더 난장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0분에 한 번씩 결혼식을 치러내야 한다면 아마 이럴 것입니다. “신랑 신부 입장.(따로 입장할 시간도 없이 같이 입장해야겠지요.)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사랑합니까?” ‘예’ 그러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신랑신부 퇴장.” “자 다음 신랑신부 준비하세요. 신랑신부 입장.” 그러다가 신랑신부가 서로 바뀌는 일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루에 113건의 결혼식을 올리는 그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혼식 전문 교회라는 것에 정말로 교회라는 말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결혼식을 전문으로 하려면 예식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야지, 왜 교회라는 이름을 붙입니까? 성스럽게 보이기 위해서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십자가를 세워놓았다고 다 교회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니까 교회를 가리켜서 15절하반절에 보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집’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집’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교회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이 한 식구라는 뜻입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물론 우리가 태어난 장소도 다르고, 우리는 서로 다른 성(姓)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김씨, 이씨, 박씨, 다양한 성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충 세보니까 우리 교회에 다니시는 분만도 성씨가 약 60개나 됩니다. 60개의 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성경은 우리를 한 가족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를 나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한 피를 나눈 사이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가장 소중한 피를 나누어 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비록 같은 교회에 나와 앉아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가족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사이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합니다. 교회를 가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이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상처를 치유 받는 곳입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그런 상처를 싸매주고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신 것은 세상에서 상처 받은 마음이 가족의 따뜻한 사랑과 조건 없는 용서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라는 가족 공동체를 허락해 주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와 성찬식을 행합니다. 세례를 통해 교회에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고 또 성찬식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나눈 가족 공동체임을 서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나만을 위한 예식이 아니라,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를 한 마음과 한 사랑으로 묶는 예식입니다. 독생자의 피로 산 우리 - 독생자의 생명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놓고 산 우리를 귀하게 여겨 주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주지 못하는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고난이 와도 핍박이 있어도, 또 부한 삶을 살아도 주의 은혜 앞에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이 거친 세파를 이기며 살아갑니다.
생각해 보새요. 당신의 살을 ?기시고 생명의 피를 쏟으신 그 주님이 믿음의 자녀들에게 이 성찬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겠습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눈 형제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수용하고 사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그렇게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을 베푸는 사랑의 가족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명확한 신앙관이 세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방황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다닐 바에야 좋은 교회에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때 계시록에 7교가 나오지 않습니까? 주님은 어떤 교회는 칭찬도 하고 이런 저런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호되게 책망도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얼마나 얼마나 꾸짖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송장처럼 생명력을 잃은 사데교회를 다니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아주 식어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에 몸담고 싶어하겠어요? 평생 고생하면서, 그런 교회 누가 다니겠습니까? 이왕 다닐려면 빌라델비아나 서머나 교회처럼 주님이 칭찬하는 교회를 다니고 싶고 그런 교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헌신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심정이어야 겠습니다.
여러분!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교인이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고 그런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중생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행복과 꿈이 교회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를 향한 소원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관심사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교회에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장로님의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교회의 주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주인노릇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되 주인노릇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 노릇 한다’는 말씀과 ‘주인의식을 가진다’는 말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를 섬길 때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주인의식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녀도 늘 손님 같습니다.
그럼 주인의식과 주인노릇이 어떻게 다릅니까? 주인노릇은 내 마음대로 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내 생각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뜻대로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인인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인기를 얻어야 하고, 내가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인의식은 다릅니다. 주인의식은 청지기 의식입니다. 청지기가 누구입니까?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기 때문에 내가 주인의 심정으로 주인의 것을 맡아서 주인이 뜻하는 바대로 잘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청지기는 묵묵히 일할 뿐,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자신을 써 주신 그 은혜 앞에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섬기는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 집은 진리의 기둥과 터 위에 세워진 집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바치고 있는 기둥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어떤 사상이나 시대적인 풍조가 교회의 기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가리켜서 ‘진리의 기둥’이라고 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집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 시대에는 ‘원주문화’라는 게 있었습니다. 큰 집을 지을 때에 집안의 넓은 홀에다 기둥을 여러 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 기둥은 기둥이라고는 하지만 천장을 받치기 위해서 만든 기둥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의 키보다 조금 높게 기둥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유명한 사람들의 흉상을 올려놓습니다. 로마 황제나 당대 최고의 지성인 또는 시저(Caesar)와 같이 존경받는 장군 등의 흉상을 올 려놓고는 그들의 사상이나 삶을 본받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의 사상이나 삶을 본받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상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 기둥 위에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만이 올려져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세상적인 사상이나 세상적인 유행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인 성경말씀만이 우리의 삶의 모범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때에 교회는 세상 풍조나 사상에 현혹되고 맙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 위에 세워져야 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진리의 터’라는 말씀은 ‘진리의 못자리’라는 말입니다. 못자리에서 모가 잘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잘 자리기 위해서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왜 성찬식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하면서 너무 자주 죄악 가운데 뒹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죄된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다시 한번 용서를 받고, 죄악된 세상을 이길 힘이 우리 자신에게 없기에 주님의 능력을 우리 안에 공급받기 위해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쓰나미와 같이 거대한 물결로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유혹과 죄악의 파도를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 머물 때에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다짐을 하나님의 집에서 영적 가족들이 가슴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대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서로 우리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와 학습을 거행합니다. 이 하나님의 집에 한 식구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성찬식에 참여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유혹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