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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3 염려하겠습니까? 감사하겠습니까? (마 6:25-3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11-14 | 조회: 1498

염려하겠습니까? 감사하겠습니까? 6:25-34. 2016. 11/13.

 

요즘 시국의 혼란스러움을 보면서 참 모두가 찹찹한 기분입니다. 어제 서울 시청과 광화문에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 지금 이 나라가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모두가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어려운 국면이 잘 수습이 되어져서 한층 더 성숙해 가는 우리 사회를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때 요즘 시종 가슴을 울리는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시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여러분, 개그맨 이동우 씨를 기억하십니까? ‘틴틴파이브의 멤버로 데뷔하여 많은 활동을 하면서 사랑을 받던 그가 어느 날 방송국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2004년 결혼을 하고 채 100일도 되지 않은 그가 망막색조변성증이라는 불치병으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 6년이 지난 2010년에는 완전히 시력을 잃고 1급 시각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시력을 잃어가면서 방황하던 이동우 씨에게 천안에 사는 30라고 밝힌 한 사람이 자신의 눈을 기증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동우 씨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지만, 그는 눈을 기증받지 않고 그냥 되돌아 왔습니다. 그 때 왜 눈을 기증받지 않고 그냥 돌아왔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미 받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이동우 씨에게 자신의 눈을 기증하겠다는 남자는 근육병 환자였습니다. 근육병을 가진 남자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에게 성한 것은 오직 하나 눈 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절박함을 가지고 눈 기증자를 만났지만,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거절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를 잃고 나머지 아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분은 오직 하나 남아 있는 것마저 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그걸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자신의 온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데도,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하나인 눈을 기꺼이 이동우 씨에게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살을 하고 싶어도 자살을 할 수도 없는 무기력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 때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는 마음을 새롭게 다짐했습니다. 어차피 죽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살 때까지는 살아보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이동우 씨가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눈을 그에게 주면 그가 정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어 기꺼이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눈을 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임재신입니다. 자신은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앞만 볼 수 있는 그 눈을 기증하겠다는 그 마음을 읽고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동우씨 자신에게 너무도 필요한 눈이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그 모습은 마를대로 메말라버린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눈을 뜬 후에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서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힘들 일상이지만 오늘도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나 일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오늘도 숨을 쉬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손을 뻗어 누군가와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다는 것, 낙엽이 지는 가로수를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계절의 변화 속에서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기르시지 않는가? 그리고 저 들판의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 자라게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중의 새나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이렇게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그 감사를 갉아먹는 기생충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의 가장 큰 적이 뭔지 아십니까? 염려입니다.

 

누가복음 2134절에,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들도록 만들어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조차 하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도록 만들 위험이 있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 되면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방탕과 맞먹는 악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영과 육을 망칩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헨리 나우웬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염려한다는 건 뭐냐.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마음이 혹시로 가득찬 것이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시집 못 가면 어쩌나, 혹시 학교 간 애가 안 돌아 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도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멍청한 짓입니까? 이런 '혹시'가 내 마음에 염려로 자꾸 차 오르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탐욕이 생기고, 조급해지고, 나중에는 우울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이와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비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오지 아니하는 내일을 놓고 왜 그렇게 염려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묶어 놓을 수 있는지 주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비결은 바로 감사입니다. 3가지의 감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감사라고 하는 쇠사슬로 염려를 콱 묶어 놓고 꼼작 못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감사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의 감사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그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어.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염려하는 제자들 보고 말씀하십니다. 유대나라 백합화는 새빨간 것이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 받는 자녀이기에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모든 범죄를 예수의 십자가로 깨끗이 씻으시고, 이제는 죄와 흠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자기 자녀들처럼 날마다 보시면서 그 머리터럭도 다 세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내 인생을 지켜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 앞에 선다면 우리는 다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절제하여 주님의 뜻을 따라 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분명한 소속감과 나는 주님의 피 값을 주고 사주신 가장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받는 존재다라는 가치감,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한 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두 번 째로 '있어야 할 줄을 아느니라.'의 감사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필요를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해 놓고는 32절에 가서 '이러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을 주님이 책임을 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지 아십니까?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아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형편을 아시고 필요를 따라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을 멈추게 하시면 우리는 오늘로 우리의 삶을 마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주셨던 것들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누리며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건강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가정의 행복이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신다면 우리의 계획과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유를 불어버리시면 아무리 많이 쌓아놓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립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풍요롭지 못하지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우리의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유를 불어버리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 일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손에 주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고 이 사랑을 알 때 우리는 진정한 감시가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감사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의 대한 감사입니다. 33절은 다 외우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확신의 감사는 좋은 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아니해도 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바쁜 세상에서도 시간 내서 주님 앞에 나와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예배가 너무 소중한 줄 알고 모든 들판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을 끊어 버리고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이 생활 자체가, 행동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일상에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생활 속에 주님을 높이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깊은 감옥에서 세상에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외칩니다. 4: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 속에 일어나는 기도로 염려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내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염려라는 두려움에 휩쌓이지 않고 감사함으로 오히려 기도의 끈을 붙들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안 해도 되는 염려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염려는 영적인 것이기에 그 속에는 사탄의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셔야합니다. 영적이라서 우리의 육으로는 못 이깁니다. 성령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나의 염려를 파괴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컵에 공기를 제거하려면 물을 가득 채우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주시는 평강으로 채우십시오.

 

우리의 삶에 염려 할 것이 많습니다. 염려할 일은 있으나 염려를 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을 염려로 채우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십자가입니다.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는 34절에 나오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며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들의 염려는 지금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그것이 끝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분노하고 해결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염려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인생을 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정말 억울한 일과 예기치 않은 일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일, 게다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당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 지난 1년을 돌아보십시오. 저는 감사는 기적의 씨앗이라는 말씀을 이 강단에서 수없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는 억지로 해도 좋습니다. 저의 경험에 결코 손해가 없습니다. 그 감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100:4절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강조하셨을까요? 감사의 문을 통과하는 자만이 주님의 잔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감사의 문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헌금 봉투에 보면 5가지 감사를 쓰라고 했습니다. 한해를 돌아 볼 때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안다면 마땅히 감사가 일어나지 않겠나요? 그리고 지금 좀 힘들다고 지금 좀 어렵다고 그냥 무관심하거나 그 힘듬의 굴레 속에 두려움과 염려가 있어서 주저앉는 다면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어느 해 보다 정말 많은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염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허약한 모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연약한 손을 내밀어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이끄실 때에 우리는 어떤 두려움 속에서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 있다할지라도 구원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시 힘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 우리는 전심을 다해 감사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한번 택한 나를 결코 놓치시도 버리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가 봐도 부끄러운 투성인데 이런 나에게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신 그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지나온 한해를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기쁜 일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 돌리시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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