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8]
아나니아와 삽비라 행5:1-11. 2016. 10/16
한국에 여행 온 한 관광객이 서울 야경을 보다가 놀란 것 중의 하나가 교회마다 달린 십자가였다는 내용을 한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교회가 많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더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그것은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은 데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C.S.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그런 고민에 빠진 우리에게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답이 무엇입니까? 교회다운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람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교회가 더 확장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이 중단되고 기독교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사람들이 교회가 무엇인지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세워진 초대 교회에 엄청난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대하는 이 사도행전을 보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32절 보세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유무상통하는 교회 - 지금처럼 개인주의가 보편화 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 부흥의 물결에 동참하는 한 부부의 이야기가 오늘 소개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아나니아란 이름은 '여호와의 은혜'라는 뜻이고, 삽비라란 이름은 '사파이어'라는 보석에서 온 것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이름만으로 본다면 멋진 부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의 결합입니다.
이들 역시 자신의 땅을 팔아 절반은 떼어놓고 나머지 절반을 바쳤습니다. 이것은 요즘처럼 소유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한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그 반을 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죽음이었어요.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부부가 다 죽었습니다. 아예 안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절반이나 바친 이들이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설령 이들이 죄를 지었다 해도 부부를 다 죽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은 죄가 뭐가 그리 심각하다고 부부를 세 시간 차이로, 그것도 교회 앞에서 그들을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사실,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지금도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하면 죽을 사람 굉장히 많을 것 같습니다. 장례식 줄줄이 치러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 제대로 안 드리면서 십일조 드렸다고 하는 것, 이와 비슷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이 주는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서도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했고, 11절에도 보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이 사건은 당시 교인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이 사건은 상당한 두려움을 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각하게 이 두 사람의 죄를, 초대교회의 부흥의 물결 한가운데서 두 사람을 죽일 만큼 엄하게 다루신 그 교훈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span lang="EN-US" style="letter-spacing: 0pt; font-family: 바탕; font-size: 12pt; mso-ascii-font-family: 바탕; mso-font-width: 100%; mso-text-raise: 0.0pt;">. 먼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각한 죄 몇 가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1.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의 영적인 순결함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병이 낫거나 기적이 일어난 곳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아나니아가 얼마를 바쳤느냐, 또 얼마를 숨겼느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으로 할 수 없더냐".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치지 않아도 사실 상관없습니다. 또 소유를 판 후에도 다 바치지 않아도 얼마만 바쳐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아나니아 부부가 얼마를 감추었다는 것에 대해 지금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의 얼마를 감춘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데 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가 그 소유를 바치면서 ‘하나님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성령을 속이고" 또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베드로 사도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는 성령님을 속이는 일, 하나님에게 거짓된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순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짓 영, 더러운 영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겉으로는 교회가 부흥하고 구제하고 선교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많은 행사를 하여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거짓의 영이 있는가? 진실의 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작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역사와 응답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순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욕심, 자리싸움으로 그 순수함을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순결하지 않으면, 교회가 성령의 역 사 속에 서지 않으면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교회의 장래는 교회가 얼마나 정직한가? 얼마나 순결한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철저히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에 대하여 간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간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이 쉽게 생각하고 자기 자랑과 칭송을 위해 더렵혀 놓을 가능성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차례로 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눈은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눈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귀머거리입니다. 오늘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장님입니다. 저기 계셔서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입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건, 죄를 짓건,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건,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한 신학자는 죽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사신 분입니까?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이신가요? 신부로서 거기에 걸맞게 순결한 삶이 드려지고 있습 歐?
2. 이 부부는 헌신의 동기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떤 태도로 드리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어 성경에는 4장 37절과 5장 1절 사이에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4장 마지막 부분에는 바나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예루살렘 교회 본 출신이 아닙니다. 저 촌구석인 구브로 출신이었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새가족이 와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하나님 앞에 드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어요. 그러니까 수만 명이나 되는 교인들의 시선이 이 바나바에게 다 모인 겁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 멤버가 아니었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 교회의 기둥을 이루는 리더자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로쯤 되겠지요. 지도자였습니다. 교인이 수만 명이 넘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면 그 교회에서 유명하고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가족이 하나 와서는 재산을 다 팔아서 몽땅 바쳤던 겁니다. 온 교인의 시선이 "와! 저 사람이 누구야? 바나바 아니냐!"하고 몰렸어요. 그러자 이들의 마음 속에 질투가 생겼어요. "그래도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인데!" 이들이 헌금한 동기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정말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질투와 자기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동기였다고 문맥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헌금한 동기였습니다.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체면 때문에 한 것입니다. 정말 드리고 싶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때문에, 그래도 내가 저 새가족보다 나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드렸던 겁니다. 결국 아까운 마음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할 수 없이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궁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적게 드리고 극대의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결과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반만 바치기로 한 것이었어요. 말과 행동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교인들은 그들이 재산을 다 드린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반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누구만 알고? 부부만 알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심각하게 보신 이들의 죄였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2절에 보면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그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감추었다"로 번역된 헬라어가 오늘 본문에서 말고 유일하게 다시 나오는 딛2:10절에서는 "훔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헌신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신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나를 위해서 사용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사랑을 받고 헌신을 받았기 때문에 헌신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헌신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span style="font-size: 12pt; mso-fareast-font-family: 나눔고딕 ExtraBold;">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그 사랑과 그 헌신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은 것,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친구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는 사랑으로 그 아들까지 주심으로 우리가 죄 가운데서 구원 받아 새 생명을 얻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는데, 그 분이 죠지 뮬러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기도의 사람이고 고아의 아버지입니다. 그에게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축복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뮬러 같은 행복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가 경험하고,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 부부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바쳤지만, 이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순종하는 헌신이 아닙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물질의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영적인 길들도 열어주시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물질 앞에서 머뭇거리니까 가정이 영적인 문제 앞에 늘 묶여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질에 대해 말씀하실 때면 ‘맘몬’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이것은 아람어로 인칭대명사입니다. 인격체를 다룰 때 쓰는 말입니다. 돈은 비인칭이고 물질이지만, 인칭대명사를 쓴다는 것은 돈이란 인격체와 같은 힘이 있어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고, 소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힘과 권력을 때로는 절망을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나쁜 것이 되고 좋은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이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앞에 쉽게 유혹되고 넘어가는 연약함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3.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가 자기의 소유를 판돈의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 베드로는 3절에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자신이 겟세마네에서 사탄의 간계에 넘어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뼈아픈 경험을 가진 적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발동하는 사탄의 역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나니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사탄을 즉각 간파했을지 모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그 자리에서 거두어 가셔야만 하는 이유는 영적으로 마귀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3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였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마음에 가득하여” 이 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가룟 유다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속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소경처럼 되어버리니까. 사단이 마음에 가득하다는 말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 때 되어진 일과 똑같습니다. 사단은 가룟 유다에게 처음에는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그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스스로가 분별할 수 있었는데도 생각이니까 어때. 생각을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생각을 품습니다. 그러니 마귀가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갑니다. 그때부터 가룟 유다는 모든 자기 의지를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합니다. 그래서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 30에 팔았습니다. 나중에 깨닫고는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양심의 가책으로 목을 메달아 자살을 하고 맙니다. 가룟유다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똑같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사단이 시기심과 탐심과 거짓말을 할 마음을 심어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생각의 근원을 살펴야 합니다. 잠언 4장 23절 말씀처럼 “모든 지킬 것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여러분, 품어야 될 생각이 있고 내좇아야 될 생각이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정확해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면 큰 일 납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면 가룟유다 같이 마귀가 들어와 주인 노릇하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게 되고 불신자처럼 영적으로 소경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에서는 이 사건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기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없수이여김을 당할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어떻게 감당을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좋은 머리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려 들었습니다. 그 좋은 머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좋은 머리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가지고 자기들이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남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쳐서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기들의 소유를 가지고 결국 자기들이 시험에 빠지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결국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와 은사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주시고, 더 풍성하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있다면 그걸 가지고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게 나에게 올무가 되거나 시험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토그 쇼의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는 “이것이 사명이다”는 자서전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짐이 아니라 사명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버림받아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라난 그녀입니다. 아홉 살에 강간을 당하고, 열네 살에 사생아를 낳았고, 20대까지 마약에 빠져있던 그녀가 세계 최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것은 사명에 대한 자각입니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서 내 인생을 살고, 내 인생의 종착역에 내가 어디에 설 것인가를 알고 사는 사람은 사명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습니까? 남이 겪지 않은 아픔이 있습니까? 더 큰 비전이 있습니까? 무엇을 보면 부담이 생깁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사명을 위해 사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전진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을 잃어버린 땅에 것에 집착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갑니다. 결국은 방황하고, 흔들리는 인생으로 삽니다. 사명에 붙잡혀 사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