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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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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9 강권하시는 사랑 (고후 5:13-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10-09 | 조회: 1183

강권하시는 사랑 고후 5:13-19. 2016. 10/9. 주일 설교

 

오늘 우리는 태신자를 세우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이 태신자를 세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중에 하나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 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눈물과 정성, 그리고 상상도 못하는 희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젊은이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동안,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전도에 대해 왜 이 강단에서 귀가 따갑도록 외치고 있습니까? 왜 그토록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인 인간이 지옥에서 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옥에 대한 설교를 우리가 들어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교인들조차도 이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갤럽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얼마 전에 조사가 끝난 거예요. 아주 최근의 조사이지요. 이 조사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대부분이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 참 중요합니다.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의 퍼센테이지가 15% 예요.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에요.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내세신앙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자살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합니다. 자살 동우회가 있어서 자고 깨면 집단 자살이 비일비재 합니다. 그들이 내세를 안다면 그럴 수가 있나요! 우리 신앙인도 이 내세에 대해 예전처럼 갈급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딤후 3:1-4 말씀을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시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이 말씀 중에 우리 시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단 한 항목도 없습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끔찍하고 무서운 일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두 번째 항목이 돈을 사랑하는 일이며, 마지막에 나오는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숭배입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변질되어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나의 모습은 없는가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든 안 가지든 간에 분명히 때가 되면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떻하시렵니까?

 

제가 신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 원주에 있는 가나안 농군 학교에 가서 신앙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때에 거기에는 이 땅에 농촌 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일가 김용기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생도들이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와 훈련을 받고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 후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 한 밤 중에 500마리의 닭과 200마리의 앙고라토끼가 있는 농장에 불이 났습니다. 한 밤중에 가족들과 생도들이 뛰쳐나가 보았지만 아비규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불이 붙은 날개를 퍼득거리며 살아보겠다고 몸부림하다가 잿더미가 되어 뚝뚝 떨어지는 닭들, 털 많은 앙고라토끼에 불이 붙었을 때에 빨간 폭탄처럼 동동 뛰다가 허무하게 쓰러지는 토끼들을 바라보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그냥 지켜만 보자.”는 것입니다.

 

모두들 멀찌기 서서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이 다 꺼진 후에 안타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흐느끼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죄악을 걸머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참함이 저렇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온 예배당은 통곡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 예배당에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경찰관에게 폭행을 일삼던 깡패 두목이 그 날 회개를 하고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유망한 청년이 거기 와서 훈련을 받던 중에 그 광경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었고 나중에는 농군이 되어서 장로님의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지옥이 그들 앞에 보이는데 어느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선교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하셨습니까?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신 바친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희생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끝날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안에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희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24절에서 예수님은 참 좋은 예를 드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 같습니까? 바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자기 자신, 성령 하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하여 친히 썩는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희생하심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희생 없이 생명을 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바울이 등장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최고의 학벌로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스스로 고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잘 안 베스도라는 로마 총독이 사도 바울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사도행전 26:24)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용광로와 같이 활활 타오르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한평생을 그 예수를 위해 뛰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죽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후에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14절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 강권이란 말은 둘 사이에 꼭 끼여서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헬라어로는 힘 있게 꽉 잡힌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주님께서 나를 아주 꽉 잡아 주셨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나를 붙드셨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구속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나를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 것은 주님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행복한 고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주님의 사랑이 꽉 잡으셔서, 이제 바울은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나를 꽉 잡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대로 끌려 다닐 뿐입니다. 그분이 가자하시면 가고, 머물자 하시면 머무는 것 뿐, 나의 의지는 이제 다 그분께 맡겨 드렸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랑의 열병에 걸린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우리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오늘 날 또한 그와의 사랑에 빠져야 할 두 가지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이유-무엇입니까?

 

첫째 이유, 그는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14b)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내 삶에 적셔있는가가 너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한없는 기쁨과 감사함이 일어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또 한없는 애통하는 마음도 일어납니다. 한 때, 자신이 하나님을 모르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그런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주셔서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또 직분까지 주셨으니 얼마나 얼마나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이젠 그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너무나 행복하고 기쁜데 세상을 보면 갑자기 애통함이 느껴져 가슴 절절한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슴 벅참으로 터질 듯한 행복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온 세포 하나하나가 다 경배하는 진리이며, 하나님의 긍휼은 한없는 애통함으로 흘러나오는 찬양이요 눈물입니다. 그저 눈물이 납니다. 감사해서 눈물이 나고, 주님 만드신 세상 보며 주님의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이 방황할 때, 그 긴 시간 사탄의 노예로 예수믿는 자들을 공회에 넘겨주는 그 포악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요. 곁에 계신 성령님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을 알 때, 그는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날마다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날마다 찬양이 흘러넘칩니다. 이제는 주님을 왕으로 모신 자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또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세상 앞에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살아가지 않습니까? - (이구절은 차마 못 읽을 때가 많다)

 

고린도후서 11:23절 이하에서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고생스런 삶을 살았습니까? 그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뼈속까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삶의 목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살게 하려 함이니라는 이 말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요. 우리의 삶의 무기력과 무감동은 대부분 목적의식의 결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는 분명히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대상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다. 나는 너를 위해 다시 살았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있단다. 그러면 넌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니?" 이 음성을 들은 그날부터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일에 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신앙인은 두 가지가 다릅니다. 하나는 영원한 복음, 생명의 말씀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아갈 때, 내가 이 땅에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룩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항상 겸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받은 그 값진 사랑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온 마음, 온 뜻, 온 정성을 모두 어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1,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 명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지금 바울은 이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자신이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가진 사명자라는 그것 때문에 한 생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19절에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여기 부탁하셨다는 말은 사명입니다. 무엇을 부탁을 하신 것입니까? 바로 화목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부여받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전도의 책임을 본문에서 18절에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가르쳐 19절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20절에 의하면 전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전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세상은 하나님이 축복할만한 세상, 하나님과 화목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일에 미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또한 미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전 과기처 장관을 지내셨던 정근모 박사님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정근모 박사가 아주 절친한 친구에게 복음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을 지냈던 김재익 박사입니다. 정근모 박사는 김재익 박사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쳤는데, 김재익 박사는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 동남아를 갔다가 그만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정근모 장로님은 가장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미뤄서 될 일이 아닙니다. 복음이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결코 전도를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지 않고서 되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동 받은 우리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전도는 희생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이 내 인생에 얼마나 충만한 능력인가를 맛보고 경험하십시요. 내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흘려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려면 복음 전도에 힘이 더해 질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아름다운 복음의 능력이 우리 모두 삶 속에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25세에 인디언 선교에 헌신하여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데이빗 브레이너드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참 의미있는 말이 아닙니까?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내 이웃의 한 영혼을 태신자로 세우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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