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사람 - 바나바 행 4:36-37. 2016. 10/2. 주일 예배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글, 정죄하는 말들이 홍수처럼 ?아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합니다. 비판의 정도가 넘어서서 몰아내려고 합니다.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하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극한 대립으로 치닫기 일쑤입니다. 국민들도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위로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불신과 이기주의가 팽배한 때,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닮고 싶은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의 별명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이름보다 별명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36절을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의 원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여기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그것이 너무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를 요셉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바나바라 알고 있는 겁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개역 한글 성경에는 권위자로 ‘격려의 아들’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격려의 아들’로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까? 본문을 보면, 요셉은 구브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고향인 팔레스타인에서 자란 유대인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레위족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사도도 아니요, 보통 레위인, 즉 우리와 같은 평신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평범한 이 사람을 위대한 바나바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바나바를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사도행전은 그가 행하였던 위로의 삶으로 인해, 그가 이러한 위대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가 살았던 격려의 삶이 너무나도 놀라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원래 이름보다는 '위로자'라는 격려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바나바의 별명을 가진 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부부간에, 교회와 사회에 그런 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이런 위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위로자의 별명을 가지고 한 교회를 세울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 시대를 감당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바나바의 삶을 추적하면서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 그는 자기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34-35절을 보게 되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당시 은혜 받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헌금을 했고 그 헌금은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 37절에 보면 바나반 여기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왜 그 많은 재산을 바친 삶 가운데 유독 바나바만 기록되었을까요? 아마도 다른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팔아 헌금에 동참했지만, 바나바가 가장 대표적으로, 가장 성실하게, 가장 모본(模本)이 될 만큼 그의 헌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구제에 대한 문제가 교회 안에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 교회의 필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의 밭을 팔기 시작했어요. 그 밭을 판돈을 전부 교회 앞에 내놓았다고 말씀합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내놓은 이유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공명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가 없어서 넉넉한 가운데 바친 것도 아니었어요. 그가 자기의 소유를 판 단 하나의 이유는 가난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격려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주 어려울 때 정말 사랑의 돈 얼마를 받아보셨습니까? 혹은 줘 보셨나요?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그 학기에 낼 등록금이 없었습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정말 고통이 따르더군요. 지금처럼 학자금 융자가 있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휴학을 할까, 과연 이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가 별별 생각을 다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등록금을 학교에다 준 것입니다. 저는 누가 등록금을 대신해 주었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저는 그때 다시 휴학을 안 하고 공부한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더 큰 기쁨은 이 신학을 하는 이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데 큰 힘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받는 것보다 도움을 주는 목회를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이것을 알았습니다. 밭을 팔아 내어놓는다고 수많은 교인들에게 무슨 큰 경제적인 보탬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기의 밭을 과감하게 팔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바나바라고 해서 왜 돈이 필요 없고, 쓸 곳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어요.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고, 저축도 해야 되고, 쓸 곳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늘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늘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겁니다. 이렇듯 격려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바라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늘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음식도 자기가 좋은 것을 먹어야 되고, 잠자리도 자기가 좋은 곳에 늘 자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건 자기가 좋은 것을 하고, 그 다음 남은 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줍니다. 그런 반면에 어떤 사람은 늘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합니다.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없어서 자기의 것을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다 채우고 나서 남은 것으로 남을 도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위로의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쓸 곳이 많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내 것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격려가 될 줄 믿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격려의 삶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보다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 그리고 그는 사람을 세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타자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주인공 의식이 아니라 남을 세워줄 줄 아는 사람, 타인을 인정하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오늘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안개꽃 같은 사람 말입니다. 모두들 자기를 나타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시대에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돋보이도록 뒤에서 이름 없이 받쳐주는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안개꽃이 뒤에서 받쳐줘야 그 꽃이 훨씬 더 돋보이는 법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어디서나 누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 혼자 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어우러져 있을 때에,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이 드러날 때에 더욱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를 보게 되면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지만, 이 바나바는 안개꽃처럼 그가 있는 곳마다 분열과 다툼보다 낙심한자와 실패한 자를 세워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세워주는 것을 봅니다. 폭스 잭슨이라는 신학자는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해 줍니다. "바나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매력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의 장기를 찾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크리스쳔의 덕으로는 우월했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했으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으며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상 바울은 세계 교회 진보에 공헌한바 컸지만, 바나바는 초대교회를 살맛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분열과 상처가 얼룩진 곳에 그의 숨결이 와닿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복음 전도자로 나서게 됩니다. 행9:26절에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이어지는 내용은 예루살렘 공동체가 아무도 사도 바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잡아 죽이던 그가 하루 아침에 바뀌는 행동을 보고 누가 그를 믿겠습니까? 또 다른 음모를 꾸밈으로 교인들의 신상을 파악한 다음에 모조리 다 잡아가기 위해서 작전을 펼치는 것일 것이라는 의심을 갖던 그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도 바울에게 격려를 보내는 한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이 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그가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신원 보증을 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신원보증을 듣고 행9:28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라고 말했습니다.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당한 증거자의 사역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복음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를 믿어주었던 사람,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던 사람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인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바울은 고향인 다소로 내려가 그곳에서 무려 10여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복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던 바울이 어느 날 낙향하여 아무 할 일 없이 10여년을 칩거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열정도 꿈도 들의 꽃처럼 시들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포자기하고 있을 그 시간에 새로운 인생의 길, 목회자의 길로 이끌어 준 사람이 또한 바나바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책임자였던 바나바가 아무런 목회 경력도 없는 바울을 자신의 동역자로 부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교 졸업하고, 10여 년 동안 시골에 내려가 칩거하고 있던 청년을 동역자로 불러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가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할 때 바울을 천거합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최초로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세계 선교의 첫 발을 내딛게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길목에서 그를 이끌어준 절대적 존재입니다. 만약 바나바가 없었다면 바울은 결코 초대교회의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성경에 마가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이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때 함께 선교를 떠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가가 선교여행 중에 이탈을 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데 시간이 흐르고 다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 바나바가 이 실패한 젊은 청년을 다시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바울은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결코 포기를 안 합니다. 이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갈라서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바나바는 이 때문에 정말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바나바가 그때 쓰러진 마가를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성경책 중에는 그토록 중요한 '마가복음'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실패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믿고 위로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세움을 입어서, 결국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놀라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쓰며 차디찬 감옥에서 마지막 임종 직전에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내 주변에 나를 따르던 자가 다 떠났다. 이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 그리고 유언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디모데를 향하여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 오라! 저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이니라!"(딤후4:11) 마가를 데려 오라! 마가를 데려 오라! 마가와 화해하려고 한 겁니다. ‘저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이니라!’ 이 바나바의 배려와 믿어줌 때문에 마지막,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고마우십니까? 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참 고맙더라고요. 누군가가 우리 서로 믿음을 가지되 상대를 믿어 줍시다 그러니까 "목사님, 사람을 믿으라니요? 차라리 우리 집 개를 믿지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개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개는 배신을 안 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복날에 개를 배신하지요. 사람은 우리를 배신합니다. 제가 전도시 시절에 있을 때, 우리 교회에서 여전도회 회장님이 계를 했어요. 여전도회 회원을 다 모아서 계를 했는데, 회장이 우두머리를 하다가 계돈을 다 모아서 떠나 버렸어요. 그 교회 계판이 개판이 되고 말았지요. 난리가 났어요. 눈만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들을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바나바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격려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을 믿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도움과 사랑, 그리고 나를 믿어주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한 산동네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시고 신학을 마치신 젊은 목회자가 달랑 가방 하나들고 산동네에 온 것입니다. 다 쓸어져 가는 허름한 집 하나를 개조해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사모는 굶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동네는 그를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희망을 잃은 수많은 실패자들, 내일을 체념한 채 사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내 놓았습니다. 그 눈물겨운 희생은 생명을 낳게 하는 참 기쁨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뭐,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올 때 반드시 누군가의 배려가 없이 어떻게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과연 여러분을 위해 희생과 헌신한 그들의 섬김의 대가로「살아 남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가?” “그들의 거룩한 희생을 과연 여러분은 감사하게 받으며 살아왔는가? 답을 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나 하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신 분입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자격을 따지셨나요, 무엇을 요구하셨나요?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 은혜와 이 사랑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사40: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상처 입은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역시 전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먼저 손 내밀어준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사랑입니다. 독생자까지 주신 사랑,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까지 주신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그 은혜 앞에 중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하고 말입니다. 그 은혜를 깊이 알수록 우리는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그들을 격려합니다. 그 은혜를 아니까 헌신이 일어나고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혜사 성령의 별명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돕는 자, 위로자입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로해 주시려고 우리 곁으로 오셔서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또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우리의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은은한 커피 향처럼 그리움만으로도 행복을 주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바나바를 그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아름다운 가을 향기에 젖어 그리움으로 향기를 주는 바나바 같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선명하게 기억되는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