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5] TOGETHER 행2:43-47. 2016. 9/18. 비전 선포의 날
오늘 우리교회는 ‘한 생명을 주님께로’라는 표어를 가지고 터치 153 새 생명 축제 비전 선포식을 갖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새 생명 축제를 한지도 벌써 1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한 생명을 주님께로 라는 이 터치 153 새생명 축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컸습니다. 전도 한번 안하던 분이 용기를 내어 친구를 데려 오기도하고 어떤 분은 평생 처음 세벽 기도와 철야에 참석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뚜렷한 열매가 없자 우리 안에 형식과 타성이 일어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역은 우리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다중 지능론 창시자인 ‘하워드 가드너 박사’는 “사고의 틀을 20퍼센트만 바꾸면, 인생의 80퍼센트가 달라진다”고 했다. 우리가 최소한 우리 안의 부정적이고 비관적 사고의 20퍼센트만이라도 긍정적이고 낙관적 사고로 바꾼다면 우리 인생의 80퍼센트가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오늘 여기 동참한 모든 분들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이 일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에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시무시한 로마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Together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언제나 Solo 정신으로 살지 않고 Together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다같이 4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함께’를 잘하면,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부러워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더불어 신앙생활을 잘하면, 교회 안에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고 싶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1.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 교회가 세상 앞에 희망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자발적으로 배움의 자리에 섰습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구절을 원문에서 곧바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과,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는 일, 그리고 기도하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정말 엄청난 역사를 만나보게 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뜹니다. 심지어 죽었던 자가 살아납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사도행전에는 일상의 삶처럼 이런 기적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만 보면 안 됩니다. 이런 일들은 당시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임심을 믿게 하는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본문은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도들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려는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복음이 이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난 목회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가장 큰 기적을 들라면 “삶이 변화된 사건입니다.” 복음이 발견되면,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됩니다. 내가 변화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남자들에게서 일어났던 변화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술과 담배를 끊게 되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던 것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의지를 바꾸어 주시고, 삶의 성향을 바꾸어 주시므로 일어난 일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은혜의 교회 박정식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천에 창녀들과 극빈자들이 모여 있는 학익동에다 아내와 함께 천막 교회를 치고 이곳 주민과 함께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개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치유 사역이 우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병자도 낫고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안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기와 반목, 그리고 분열의 뼈아픈 경험을 해야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사 복음서를 붙잡고 묵상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말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가르침”이라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쳤다."는 단어였습니다. 헬라어로 "디다케"라는 말인데 말씀을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그런데 똑같은 성경을 봐도 사람이 관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자기가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르쳤다’에만 동그라미를 계속 치면서 읽었답니다. '가르쳤다'가 '기적과 이적'보다 아홉 배가 더 많았습니다. 9:1의 빈도입니다. 그런데 기적과 이적조차도 기적과 이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깨달은 것은 왜 사람이 안 변하나? 왜 안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거꾸로 사역을 한 것입니다.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거기서 새롭게 목회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회를 포기하려다가 ‘ 아니구나’ 다시한번 해봐야겠다는 불꽃이 가슴에 와 닿자 그는 달동네에서 미친 듯이 제자훈련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 교회가 한국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교회로 많은 교회의 사례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초대 교회의 제자훈련은 단지 고급지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사역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임재 앞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지를 피를 토하듯 가르쳤습니다.
2. 그뿐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예배하는 교회였습니다.
46절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거룩하신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 순간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모습은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위대한 영적 거인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레는 이런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입이 만 개라면 만 개의 입을 다 벌려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어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지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배의 심정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을 지키고,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가 이어져왔고, 이 세상을 바꾸어 왔습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 영혼의 세포가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가 제대로만 예배를 드리며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해 계시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데, 그 영광 앞에 어떻게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중요한 사업 계약을 따내야 하는데 그 물건 팔 사람을 이곳에서 11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늦겠습니까? 어쩌다가 한번 예배에 늦을 수는 잊겠지요. 그러나 늦는 사람들이 계속 늦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까? 찬양할 때 정말 마음이 기뻐서 찬양해야 합니다. 박수를 쳐도 왜 맥없이 칩니까? 공산당은 한낱 인간을 찬양하는데도 그렇게 온 힘을 다해서 치는데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찬양하는데 그냥 팔장을 끼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노래를 못해도 좋습니다. 예배 시간에 진심으로 한번 참여해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게 되어있습니다. 정말 예배에 나올 때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내게 어떤 감동을 주실까?’ 기대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배 나오기 전에 단 10분이라도 기도해 보십시오. 찬송이 시작되면 기쁘고 간절하게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께서 조율해 주시는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조율을 받아야 합니다. 음정이 틀린 것을 조율하듯이 내 영혼의 더러운 것과 잘못된 것, 부족한 것들 하나님 앞에 다 고침 받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한번 잘 드리면 가정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 삼령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예배드리다가 병이 나았다는 간증이 그래서 생기는 것입니다. 영혼이 고쳐지니까 육신도 고쳐지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여러분!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됩니다.
세번째로 초대교회는 함께 사랑을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여기에 섬김과 나눔이 향기가 있었습니다. 44-46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인생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알았지만, 그들 속에 성령의 임재를 통해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세요.
이들이 누구입니까? 저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 폭도였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이었지만, 이젠 이렇게 완전히 변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행4:34-3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이 은혜의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소유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초대 교회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핍절 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으면 못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들을 다 받으시고 아낌없이 나눈 그 사랑을 깨달았을 때, 자신들이 지닌 소유보다 더 큰 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의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이 쉽습니까? 쉬운 게 아니잖습니까? 요즘처럼 돈에 대해 민감할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요즘 보십시오. 우리의 사회 구조가 한 푼이라도 더 소유해야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서점 등에 가보면 재태크 방법이니, 주식투자의 지름길이니, 100% 수익보장이니 하면서 ‘돈 버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돈 쓰는 방법’에 대한 책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돈을 벌 줄은 아는데, 쓸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돈을 모을 줄은 아는데, 돈을 풀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즘 2-30대의 주요 관심사가 조사되어 신문 통계에 났습니다. 주요 관심사 중에서도 첫째가 노후대책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20대, 30대가 벌써 연금도 들고 상가를 알아본다든지 하는 대책을 세우느라 정신없다고 합니다. 요즘 주부들은 재테크에 한창 열을 올릴 정도로, 그리고 은행 지점장을 바꿀 정도로 돈의 흐름을 붙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자녀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는가에 혈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뭐, 주님은 이것 자체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이것만이 전부인 냥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을 모릅니다. 이 소유욕의 절정은 탐욕으로 나타납니다. 부모님 유산을 조금 더 받아야 우리 인생이 정말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가져야하겠지요. 동생에게 안 나눠주고 혼자 다 차지해서 행복하다면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 인생이 행복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 외로워지고 고독하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여 우애를 쌓는 아름다운 관계는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기가 없어도 다툼이 없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지 고기 쌓아놓고 다투어보십시오. 먹어도 위장질환 걸립니다. 속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보십시오. 이 초대 교인들은 이 소유욕의 탐욕으로부터 자유하기 시작합니다. 나누니까 자유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필요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늘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그 능력을 베푸시는 넉넉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설령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고 해도, 그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 분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엡3:20절에 보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으로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누구보다 깊이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면 우리는 눈을 뜨게 됩니다.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고 내 삶 전체를 아낌없이 드립니다. 그것이 희생입니다. 헌신입니다. 자기 포기입니다. 물질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소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내 시간도 내 인생도 내 재능도 나의 삶 전부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돈벌이를 합니다만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 주소서” 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섬김과 나눔이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 47절을 보세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 할렐루야!! 이들의 삶을 보고 당시 예루살렘의 모든 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저들이 믿는 하나님을 보고 또 그 앞에 달라진 사람들을 보고 그들 역시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더 이상 피를 부르고, 저주하는 죽음의 거리가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축복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것이 부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초대 교회의 부흥이 파도처럼 밀려와 우리의 영혼에 적셔지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 동성 교회가 요셉같이 꿈꾸며 지혜로운 비전의 자녀들이 넘쳐지고, 다니엘과 같은 믿음의 젊은 리더들을 많이 배출하고, 또 안나와 시므온 같이 성전에서 평생을 기도하는 어버이들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바울과 같은 전도자들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