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4] 어찌할꼬 하거늘④ 행2:37-42. 2016. 9/11.
프랑스의 작가 삐에르땅 빠셍이 쓴 작품 중에 '우리의 삶의 날들'이란 제목의 단편이 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그라는 마을에, 마음씨 착하기 그지없는 곱추 우그린이 누나 소랑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데다가 어머니는 중증의 알콜 중독자였기에, 누나인 소랑케가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으며 곱추 동생 우그린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소랑케는 뜻밖에도 도둑의 누명을 쓴 채 옥살이를 하고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소랑케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맹세코 결백했지만 사람들은 믿어 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랑케는 몸을 팔아 곱추 동생 우그린을 부양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곱추 우그린이 마을로 나갔을 때 마침 그 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우그린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쓰러진 우그린을 발로 차고 밟으면서 창녀의 동생이라 놀려대었습니다.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다 똑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곳을 지나가던 그 마을에 수도사 그 장면을 목격하고 무리들에게 호통을 치며 피투성이가 된 우그린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곱추 우그린은 강에 투신하여 자살해 버렸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나 소랑케는 권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랑케와 梨琉 남매의 자살 소식을 접한 신부님은 '이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며, 가슴을 치면서 탄식했습니다. 마침내 장례식 날이 되었습니다. 우그린 남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모두 장례가 거행되는 마을 예배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장례를 집례 하는 수도사가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소위 기독교인들이여, 이 세상 마지막 심판 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착하디 착한 곱추 우그린과 마음씨 고운 누나 소랑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마을 사람들이 수도사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주님의 양떼들로는 더더욱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리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리떼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하는 그 수도사의 절망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런지는 그의 설교를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리떼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 절망하고 탄식하는 까닭은 하나―인간은 본래 이리가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코 이리일 수 없는 인간이 하루아침에 이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면 그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유린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동생 아벨을 단지 시기심으로 쳐 죽였던 가인이 이리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아내야 어찌 되건 말건 자기 한 목숨 살겠다며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다가 그 아내를 빼앗겼었던 아브라함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굽인을 때려 죽였던 모세가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삼촌을 교묘하게 속여 삼촌의 재산을 횡령하여 부정 축재했던 야곱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충복의 아내와 몰래 통정하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아예 충복을 살해해 버렸던 다윗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던 바울이 이리가 아니었었단 말입니까? 도대체 성경에 나타난 인간 중 본래 이리가 아니었던 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당시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비참하게 죄인의 괴수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예수님을 무덤에다 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을 굴려 가지고 그 어구를 막았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가장 세도가 당당하다는 빌라도의 어인을 가지고 봉인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군사들을 동원해 밤낮 없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 순간을 보면 죽음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그 무덤에 갇혀있던 예수그리스도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죽음이 손을 쓸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는 자 앞에 죽음이 힘을 쓸 수 있습니까? 지키는 것도 헛수고요, 인봉 해 놓은 것도 쓸데없는 짓이요, 아무리 군사를 동원해도 다시 상황을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어느 누구도 이야기 못하던 이 사실을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11제자들이 세상 앞에 외치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그토록 고대했던 성령이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임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뒤 다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랬더니 천상의 언어가 터져 나왔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뒤 터져 나온 이 언어는 세상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큰 무리가 와 있었는데 15개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들이 각각 未璲 태어난 곳의 언어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는 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세상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놀람 그 자체였습니다.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던 사람들 중에 일부는 아예 13절에 보면 '새 술에 취한 사람들' 같다고 조롱했습니다.
이런 충격과 혼란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14절에 보면,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혼란스러운 상황- 다시 말하자면, 자신들이 무시하고 하찮게 여긴 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를 하자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12절에 보면 “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무슨 말입니까? 갈릴리 어촌에서 평생 고기나 잡고 살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그것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당시 누구에게나 이슈가 된 예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까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제자들을 가리켜 ‘새 술에 취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15절부터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는 말부터 한 것입니다. ‘제 삼 시’는 지금 시간으로 하면 오전 아홉시입니다. 그 시간은 당시의 생활양식상 아직 첫 식사를 하기 전일 뿐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이어서 정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술에 취해있을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니 그 시간에 제자들에게 새 술에 취했다고 한 말은 대단히 모욕적인 말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아침부터 술에 취해있다니 정말 미친놈들이군!’ 하는 뜻이거나 좋게 봐줘서 ‘술 취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하는 뜻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우선 ‘지금 시간이 오잔 아홉시인데 우리가 술에 취해있는 것일 리가 있겠는가?’라고 반박을 합니다.
여기 베드로는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무슨 말입니까? 비록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로마 군사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들었지만 이 예수를 24절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사망과 그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우리가 32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고 당당하게 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루살렘 저자 거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36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당시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이제 37절로부터 41절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을 적고 있습니다. 37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먼저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 먼저 '마음이 찔렸다'고 했습니다. 예리한 칼로 무디어진 양심을 잘라내듯이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뜨끔뜨끔 양심의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성령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이 자기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새 술에 취했다며 조롱한 태도와는 얼마나 다릅니까? 그만큼 베드로의 설교가 위력을 발휘했다는 표시입니다.
그 다음에 청중이 보인 반응은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만 좋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성령을 모독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외마디 비명처럼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탄식을 합니다. 저자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은 광장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어찌할꼬’라는 처절한 자신의 죄 성을 깨닫는 시간을 갖습니다.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자신이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깊이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깔뱅은 기독교 강요 1권 신지식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자신을 알 수 없다” 바로 이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 십자가에 못을 박고 저주하며 희롱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광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뒤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메달아 주인 그 예수가 바로 자신의 구원자임을 알고 ‘어찌할꼬’ 하며 절규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38-39절에 보십시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여기서 베드로는 두 개의 명령동사로 답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회개와 죄 사함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런대 회개는 단순히 도덕적 반성이나 뉘우침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성을 내포합니다. 회개( Repentance)라는 말을 좀 더 정확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va)인데, ‘돌다’ ‘방향을 바꾸다’(turn)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 즉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턴(U-Turn)하는 것이죠. 진정한 회개는 잠시 마음속으로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입술로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것은 단순히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록도 남지 않았고, 어떤 자국도 없으며 하나님의 기억에서 조차 지워졌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받았으나, 재판 원본은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우리의 죄의 어떤 기록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감추고 숨기고 삽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불안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도 이 문제의 해결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은 우리는 죄를 감추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춤추고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 어찌할꼬 - 이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고백입니다.
여기 보세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찔려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믿는 사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 보세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신도의 수가 몇 명이 되었다고요? 삼천이나 더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동조하고 죽였던 사람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살아있는 신앙이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껏 걸어왔던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걷노라면 내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달리 보일 수밖에 없고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케 하신 줄 아십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도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영적 대각성 운동도 이와 같은 회개의 시작에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 1월이 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습니다. 그 사경회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글이 총신 대학에서 나오는「신학지남) 14권 제 2호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
이 기도회 도중에 길선주 장로가 강단에 나오더니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 내용은 ‘그가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1백원은 수고비로 조로 인정하여 떼어 먹은 것’을 만인 앞에 고백을 합니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습니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선교사로 왔던 윌리엄 블레어는 “기도가 계속되자 무겁고 슬픔마음이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였고 이어 모든 청중들이 울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며 고뇌에 찬 모습으로 마루바닥을 두 주먹으로 두들겼다. 우리집 요리사도 죄를 고백하고는 회중 가운데 주저앉아 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말씀해 주세요. 저 같은 사람도 소망이 있나요? 저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그러고는 마루바닥에 뒹굴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고뇌에 찬 비명이었습니다. 죄를 고백한 후에 이따금씩 모든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기도를 했는데 수백명의 청중이 함께 모여 드린 이 통성기도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 장로라는 분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시작했는데 아바지 아바지 외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교회당 지붕이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김장로 곁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면서 이 전에 걸코 한번도 기도해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도했다” 평양의 대 각성 운동은 구한말 나라의 주권을 잃고 피폐해져가는 생활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사람들이 꿈을 잃고 술과 놀음에 빠져 있던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이끌어간,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남강 이승훈, 우남 이승만, 월남 이상재, 고당 조만식 등과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부흥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참으로 만나고 예수를 참으로 주로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제 변화의 흔적, 변화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어찌할꼬’는 삶의 절망에서 희망의 날개를 펴는 승리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끄집어내시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 안에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은 구원받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의 끈으로 결코 그 어떤 것이 달려들어도 빼앗기지 않도록 성령의 줄로 단단히 붙잡고 계십니다. 이제 이 은혜 이 사랑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고전6:19-20에 보시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이제는 과거에 불의와 불법에 드리던 지체를 돌이켜 의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남은 때를 소중히 여기십시다. 무엇보다 은혜에서 거룩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자세로 내 인생의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의의 종으로 드려지는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