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3] 성령이 이끌어가는 공동체③ 행2:1-4. 2016. 9/4.
우리가 매 주일 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변할 수가 있으며 또 변화된 사람들의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목숨마져도 포기할 만큼 자신들의 삶을 바치는 그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사도행전의 기록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뭐냐고 하면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일 것입니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한 신자의 신앙의 색깔과 모습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게 합니다. 소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갖는 의미를 성경이 요구하고 지시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에게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유언을 합니다. 땅 끝까지 증인이 될 것을 말씀을 합니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남자,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병이 나은 경험이 있거나,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로서 대부분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명함도 못 내밀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이 말씀이 현실성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점령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마귀와 사탄과 악령을 일컬어 '세상의 신'이라고 요한복음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도무지 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명령하고 가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비린내나 풍기던 어부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저들은 중국의 진시왕도, 로마의 시져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도, 저 몽골의 징기스칸도 하지 못했던 역사의 대변혁을 몰고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새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120여명의 성도들은 더 이상 겁에 질리고 초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생명을 염려하며 두려워 떨던 갈릴리 촌부들이 방문을 걷어차고 로마의 한길로 달려 나왔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예수 앞에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300년이 채 흐르기도 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이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무엇이 갈릴리 촌부들을 이토록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역사의 흐름을 뒤흔들어 놓았습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 같은 별 수 없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key가 성령입니다. 이 악한 세상을 다룰 수 있는 열쇠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언데 인격적으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러면 그때 가진 그 첫 사랑이 아직도 내 안에 샘물처럼 솟아나나요?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내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고 싶은 그 열정이 있나요? 지금 한국 교회의 큰 아픔은 교인들이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한번 기도하면 끝장을 보는 기도, 전도의 열정...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 사데 교회 / * 라오디게아 교회
지금 한국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세상에 짓밟히는 수치와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 고통 앞에 산모가 아이를 낳으려고 힘을 쓰지만, 낳을 힘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태산아 네 무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슥4:7절에 보면 “이는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으로 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에 대해 2절에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바람은 고대인들에게 신비한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성령의 임재 또한 홀연히 임하는 신비입니다. 바람은 바다에서 물결을 요동케 하고 파도는 거대한 배들을 단숨에 삼켜 버릴 수 있습니다. 바람은 거목을 꺾고 집과 마을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 이번에 미국에 남부에 있는 마이에미를 강타한 허리케인을 보세요. 그 강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폐허 그 차체입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로 쓰여 집니다.
또한 바람은 숨결이나 생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의 골짜기를 보게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에스겔은 이 마른 뼈들을 향하여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망의 무리를 살게 하라"고 말합니다. 여기 생기라는 말은 바람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바람 같은 소리가 급하고 강하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갑자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산골짜기에서 급류가 흘러내리듯이 급하게 임했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3절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여기 이 불이 혀처럼 갈라지는데 각 사람위에 임합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뿐만 아니라 정결케 하는 역사와 심판의 상징으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이사야에게 나타난 불은 숯불로 이사야의 더러워진 입술을 태웁니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 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운 밤에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갈멜산 엘리야의 제단에는 하나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죄악이 소멸되고 죄인들이 주님 앞으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순절 날 교회를 세우실 때 왜 엄청난 바람처럼 불처럼 임재하셨습니까? 이것은 당신이 세우신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 그 구성원인 성도가 온갖 죄로부터 정결함을 입고 주의 능력 앞에 서야 세상에 증인자로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첫째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합니다.
초대교회는 매일 기적과 간증이 일어납니다. 끊지 못하던 죄를 갑자기 끊어버리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담배나 술을 끊지 못하고 더 나아가 세상 향락에 쩔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립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한번 눈길 주지 않던 사람들이 성경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늘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들이 어떤 문제 앞에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고난 중에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듯 합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전에는 예배 시간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설교가 지루하고 답답하게만 여기던 사람이 성경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실감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영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방언도하고 은사 체험을 합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기도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엎드려 자신의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카피라이터로서 뒤늦은 나이에 예수를 만난 후 ‘막 쩌낸 찐빵’이라든지 ‘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으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만재라는 분이 거듭나고 나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성경말씀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답니다. 자기의 상식이나 철학으로 예수 믿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다녔지만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순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뻥도 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 "목사 양반이 멀쩡한 것 같은데 참 거짓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향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먹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한 찬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0여 년이 다 되도록 자신이 한 것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 방법대로 세상에 취해서 살아온 것뿐인데 자기가 어디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로 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입니다.
둘째는 담대해졌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오순절에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23-24, 32, 36) 하찮은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거침없이 나왔습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말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강력하게 일어나니까 종교지도자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금지하며 위협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반응합니다. 행4:19-20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증인으로서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분위기는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잔잔한 강이 아니라 파도치는 바다의 이미지입니다. 저녁의 노을보다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더 닮았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는 교회는 역동적입니다. 의식화되어 있고 형식화된 유대 종교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억지와 강요로 나오는 순종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에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한번에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그다음은 5천 명, 나중에는 수를 셀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통제가 불가능한 역사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약속하셨던 성령이 임하시고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 성령공동체는 구원의 역사가 파도쳤습니다.
이들은 순교의 자리에 있어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겁쟁이 세상이 짓눌러도 결코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가 안디옥에서 로마로 호송을 당하여 원형 경기장에 끌려 왔습니다. 이제 맹수의 밥이 되는 순간입니다. 집행관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익나티우스는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만약 기독교의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일이라면 내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고통을 당하고 있겠는가? 이 진리가 거짓이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겠는가? 또 이것이 거짓이라면 무슨 까닭에 내 몸을 사자밥이 되도록 맡기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사자 앞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냥 눈 한번 감고 부인하면 살수 있지 않습니까?
말 한 마디로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려나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이 되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고아 신세가 되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셋째로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더 이상 자기 고집이나 자기의 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늘 순종과 겸손으로 진리의 말씀 앞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지배를 받으며 삽니다. 물질의 지배를 받고 산다든지, 명예나 권력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당은 귀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귀신이 주는 힘으로 일하고, 귀신이 주는 귀신적인 지식으로 점을 치기도 합니다. 술에 중독 된 사람들은 술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에 지배를 받거나 술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살고, 성령의 조종을 받으며 살고,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충만한 삶,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니다. 성령충만한 삶 -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 때 우리에게 영적인 기쁨, 참된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신앙의 능력, 영적인 기쁨은 하나님께 완전히 지배받는 삶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성령의 지배 받는 사람의 특징은 늘 감사합니다. 기쁨이 마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데, 보혜사라는 말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인도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인도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영적인 소경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의 기간 동안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학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 다.
누구의 역사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입증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이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신 우물물을 똑같이 마셔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령은 이미 교회에 임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모두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거하십니다.
보세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아직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세계는 테러와 전쟁, 그리고 기아와 굶주림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사탄이 그저 제철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하여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한국교회는 이 시대 앞에 직면한 이 문제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동성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부흥의 진원지가 되고, 온갖 퇴폐로 무너져가는 한국 사회를 바로 세우는 영적 생수의 발원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올해 표어처럼 자람과 성숙, 그리고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 성령이 이끄는 공동체로서 누구나 동성 교회에 오기만하면 은혜를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믿음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