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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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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8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 (행 1:12-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8-29 | 조회: 1236

[사도행전 강해2]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② 행1:12-14. 2016. 8/28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나요? ‘목이 빠질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학수고대’(鶴首苦待)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학수고대와 같은 애절한 기다림은 아니라 할지라도, 살면서 기다림에 대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다림이 다 행복하고 희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불안한 기다림도 있습니다.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은 빚 갚아야 할 날을 불안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의미 없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기다림에서 얻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우리의 삶에 희망이나 기쁨을 주지 못한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기다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기다림은 보다 영원한 소망이요 생명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 없이 뭔가를 얻을 수도 없고, 기다림이 없이 뭔가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기다림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기다리게 하신 후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노아는 120년을 기다리며 방주를 만들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430년이란 정말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내몰린 후 40년의 세월을 기다린 후에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에게 엄청난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제는 세상을 변화 시켜라. 나는 떠난다. 너희가 증인이 되어 너희 가정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 시키고, 이 사회를 변화 시켜라” 우리 자신도 변화 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킵니까?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한 가지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애들아, 이것은 너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너희가 능력 받지 않고는 그 일을 행할 수가 없다. 그러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들에게 능력을 부어 줄 때까지 기다려라”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고전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5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장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락방에 머문 사람들은 120여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너무 쉬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내 것으로 소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는가? 오늘 이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이들은 먼저 다락방에 모여서 어떤 토론이나 회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가슴을 열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여러분, 다락방에 머문 사람들은 120여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구성원을 보면 이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먼저 제자들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 공생애 기간 동안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늘 다투던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여인들은 또 어떻습니까? 아시는 것처럼 그때 여인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 남자들의 모임에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가의 다락방은 세상을 움직이는 복음의 역사가 온 땅에 펼쳐지는 영적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바로 그들은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 이 다락방은 회개의 용광로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은혜 받는 삶을 살고 싶나요? 오늘도 예배 가운데 임하신 성령의 능력을 붙잡으십시오. 나는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은 아닌지, 나의 말과 행동과 습관이 혹시 죄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는지,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허물과 실수, 나의 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회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좀 더 새로워지고, 좀 더 성숙해지려는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설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삶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내려 주십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성도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완벽주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늘 남과 스스로에게 ‘하라, 하지마라’ 명령을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이들의 삶에는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열매도 없습니다. 그 속마음은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 되어 기도하면서 그 약속을 기다립니다.

14절 보세요.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마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가는 사도들이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보십시오. 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노래하고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환경이 다르고 나이가 다른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입니다. 미국을 영적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무디는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조율시키는 것”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어떤 연주회를 할 때, 악기들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 악기들이 튜닝이 잘 안 되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연주를 하려해도 귀에 거슬립니다.

 

튜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제가 아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떡인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피아노 연주자인데 문화회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피아노 조율사가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조율을 이미 다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피아노를 몇 번 두드리더니 마음에 안 맞는지 조율사를 불러다가 요청을 합니다. 피아노 한 쪽 소리를 치면서 ‘음이 맞다, 안 맞다는 차원이 아니라 ’너무 탁하다. 그렇게 해서 맑게 해 놓으면 ‘너무 날카롭니다’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조율사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조율하는데 한 참 소리를 듣더니 ‘이젠 됐다’는 것입니다. 조율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조율이란 연주자가 가장 편하게 연주 할 수 있도록 그 악기를 준비시켜 놓는 것, 이것이 조율입니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의 부족함을 다 내놓고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어떻게 기도합니까?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힘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스카르테레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자신을 붙들어 맨다’라는 뜻입니다.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단 한가지 이 다락방에 머무는 것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이야기와 그들에게 주실 성령을 이야기 하신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성령을 언제 보내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10만에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셨지만,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한가히 기다리며 사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에겐 지난 3년 동안이나 믿고 의지하고 따라다녔던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들 주변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강퍅한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예수를 따라다녔던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면 자기들도 스승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엄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어떤 희망도 앞으로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다른 것 하지 않고 그저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되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다“

셋째, 약속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람을 세웠습니다.

본문 16절 보세요.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베드로가 기도하다 말고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갑자기 유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시편을 인용하면서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0절 보세요.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베드로의 설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12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가 죽었으니 그 대신 한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후보를 천거했는데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이들을 제비 뽑아서 누가 사도로 뽑힘을 받습니까? 맛디아였습니다. 이 맛디아가 뽑힌 동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24절에 보면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무슨 이야기입니까? 유다가 왜 멸망을 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당시로 말하면 엘리트였습니다. 욕망도 있었고, 야심찬 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늘나라의 비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처음 가졌던 욕망 대신에 복음으로 변화되어 참으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전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공동체의 회계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예수님께서 믿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겉모습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만 예수님을 ?았고,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예수님의 제자 노릇을 했지만, 마음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맛디아는 누구입니까? 맛디아가 누구인지 사도행전에는 별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는 인물입니다.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사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바로 마음 때문입니다. 유다는 그 마음이 불의의 삯을 가지려는 유혹에 빼앗겼고, 맛디아의 마음은 오직 주님의 증인이 되고자하는 것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이 맛디아는 일관된 변함이 없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당신이 기적 같은 놀라운 선교를 할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프로그램도 아니고 전술 전략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어떤 큰일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에도, 절박함에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열두 제자 곧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워지는 믿음 생활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하신 성령의 시대를 여신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꼭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을 세워야 한다”라는 명령을 주시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세우는 가운데 1장이 끝나고 다음 2장이 시작되면서 시작하자마자 성령님이 임하시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 헌신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 놓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헌신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것을 쓰지 않으며 자기희생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희생이 없이 새로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희생이 없는 전쟁은 없습니다. 희생이 없는 역사는 없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이 아직 헌신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를 준비시키시는 분인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가의 다락방- 거기는 패배자들이 모인 자리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다시는 일어설 것 같지 않는 한숨과 절망이 서려오는 현장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120명을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봐도 요즘 잣대로 무엇을 일으킬만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어떤 고난 앞에서도 견디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번 일본에서 선교하는 분들을 보고 정말 많아 울고 왔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 길을 떠났지만, 우리나라 교회에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왜 일본이냐고 핀잔을 줍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무슨 소용이냐고 말입니다. 또 선교사님들은 일본인들에게도 환영 받지 못합니다. 한 선교사님은 저 일본 최남단에 코치라는 시골에 사모와 단 둘이 교회에 엎드려 살아갑니다. 그들이 못 배워서가 아닙니다. 바보여서가 아닙니다. 두분이 2년째 목회를 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사모와 할 말이 없게 되면 바닷가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씁니다. 여기 글을 하나 받아 왔습니다. (처음처럼) 한국에 있을 때, 사업도 해 보고 모든 것 다 누렸지만, 여기엔 그저 교회로 쓰는 낡은 집 앞에 눈에 들어오는 바닷가의 파도 소리를 들어가며 처음처럼, 처음처럼 처음처럼..... 수도 없이 되내이며 그 길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다짐하며, 한 생명을 오늘도 보내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은 결코 실패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사역의 현장은 정말 쉽지 않은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가운데 믿음으로 지키고 이겨나갑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의 자리를 놓지 않습니다. 찬양하는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 길이 나에게 더 의미 있고 복된 길이라 하신다면 주님 끝까지 걸어가겠습니다. 인내하며 걸어가겠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 많이 힘들었어요,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죠!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기적은 없었지만 이 고난을 이겨오며 주님 뜻을 이룬 것 자체가 내 삶의 기적이었어요. 바로 주님 앞에 주님! 제가 믿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순간을 바라보며 천국의 소망을 놓지 않고 고난 가운데에서도 걸어갔던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게 복을 나눠주었던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은 정복당했던 것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이들은 지금은 볼품이 없지만, 그러나 장차 오실 그 부활의 주님이 맡긴 그 일에 내가 쓰여지기 위해 회개하며 그 약속 하나 붙잡고 기도한 그 자리는 바로 생명이 약동하는 자리요. 그들 앞에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축복의 자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읽어드리며 메시지를 마감하려 합니다. 여러분, 여기 실패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을 부르셔서 증인자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도, 또 내 세울만한 것 하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뭔가 하실 일이 있으시기에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미련한 우리를 불러 하늘의 지혜를 주시고 그 하늘의 지혜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가장 약한 우리를 불러 하늘의 능력을 주시며 세상을 이기며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늘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죄인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안 목사도 그렇고,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집사님이나 어떤 직분을 가졌다 하더라도, 또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믿음으로 살아오신 분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주님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께서 나를 부르신 그 은혜의 다락방, 약속이 있었고, 첫 사랑이 있던 그래서 나를 기꺼이 주님께 드리며 나 부족합니다. 나 연약합니다. 나를 써 달라고 그렇게 부르짖고 울었던 그 자리에 우리 다시 머물러 주의 은혜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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