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1] 왜 하나님 나라인가. 행1:1-8. 2016. 8/21.
요즘 브라질 리우에서 열리는 올림픽 때문에 전 세계인들이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올림픽의 모토를 아십니까? ?보다 빠르게(Citius), 보다 높게(Altius), 보다 힘차게(Fortius)?입니다. 스포츠 정신을 나타내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호를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애를 쓰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금메달을 따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앞서 가고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쟁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물론이고, 앞선 사람들 역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더 앞에 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실제로 이런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내용인데, 「워싱턴 포스트」지에 소개되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인데, 올림픽 메달리스트 중에서 행복도 순서가 ?금-은-동?이 아니라 ?금-동-은?이라는 겁니다. 은메달을 딴 선수들은 금메달을 놓친 데 대해 아쉬워하면서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반면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그나마 메달을 딴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육상 1500m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아벨 키비아트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우승후보였건만 마지막 몇m를 남겨놓고 추월당해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90살이 넘은 그는 지금도 한밤중에 깨어나 ?도대체 내가 그때 어떻게 해서 금메달을 놓쳤지??라며 자책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인생에 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세상에서의 성공이 무조건 행복인가? 또 행복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오늘 성경을 보면, 세상의 성공보다 더 귀한 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한 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물론 금메달 따는 것 좋습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 좋습니다. 돈과 명예, 권세를 얻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붙잡히게 되면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바꾸게 됩니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꿈과 욕망을 내려 놓습니다.
몇 해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선교지에서 참 놀라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에서 사역을 마치고 버스로 10시간을 타고 도미니카로 국경을 넘어 왔습니다. 거기에 김현철 선교사님이 저를 기쁘게 영접해 주셨습니다. 이분은 저 뿐만 아니라 어느 선교사든 도미니카에 오기만 하면 아파트를 아예 선교사를 위해 제공하고 그렇게 잘 섬겨 주십니다. 지금의 프로 야구를 만든 전 삼미슈퍼스타시즈의 구단주요, 삼미그룹의 회장을 지냈던 한때 정말 잘나갔던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인이었습니다. 그 집에 3일간을 머물면서 받은 인상은 지금도 ?기지 않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회사가 정부의 미움으로 혹자 부도가 나고 실의에 빠지면서 정말 모두를 증오하는 삶을 살다가 직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 과정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 앞으로 돌아 온 분입니다. 그리고 도미니카로 와서 선교 센타를 위시해서 교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분인데 저보고 고생했다고 제가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거기에 계셨던 몇 분도 우리나라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지리에서 느낀 것은 정말 낯선 목사에게 이렇게 자신의 집을 열어서 최고로 대접을 하며 항상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는가, 사람은 몇 번 이야기를 나누고 보면 그 사람이 참인가 거짓인가 진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직 관심은 내가 라는 이야기는 안합니다. 제가 거기 식사를 하면서 그분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들로 하여금 다 버리고도, 다 잃고도 가슴 설레는 기쁨의 삶을 살아갈까였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던 하나님 나라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이 사람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세상이 원하는 것을 다 쥐어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이렇게 우리 인생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한 가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전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분이 대중 앞에 나타나셔서 입을 여실 때 그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나라 표현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 이것이 그의 첫 마디였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전한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서서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 때, 그분의 마지막 마무리 메시지가 무엇이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천국은 마치 손에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가지고 생애를 마무리 지으시더니,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그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고 죽음까지 맛 보신 다음 사흘 만에 살아 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신지 아십니까?
우리가 함께 읽은 1:3절에 보십시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보시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그렇다면 이 하나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까지 주님의 최대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의 꿈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만큼 하나님 나라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소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현실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러한 불만이 1장 6절에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가 해방될 날이 언제입니까?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는 수 백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착취와 고통을 받으면서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다급한 현실입니까? 얼마나 답답한 현실입니까? 힘만 있다면 당장 로마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 주고싶은 생각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처참한 환경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놓고 주님은 한마디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약간의 불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손에 쥐기 보다는 신문을 먼저 듭니다. 그만큼 우리의 관심은 세상에 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경건하게 살기를 작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면 성경 말씀 들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앉는 분들 외에는, 교회는 다니지만 성경보다도 스마트폰에서 다양한 기사를 검색하며 살아가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세상 일이 우리에게는 심각한 사안이란 말입니다. 세상 일 치고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정치, 경제문제 자녀교육 문제도 얼마나 시급합니까? 그 밖에 부부 문제, 사업, 건강, 앞으로 내가 추구하는 목표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성공의 문제 등 우리에게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현실 문제라고 해서 다 속된 것이 아닙니다. 현실 문제라고 해서 신앙과 관계가 없지 않습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배하는 우리라고 해서 현실문제와 동떨어진 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것을 모르셨을까요? 병든 사람의 사정을 예수님이 모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모르겠습니까? 압박당하면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사정을 주님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관심은 현실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현실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면 우리의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인생관 안에 하나님 나라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성경 끼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그 사람의 인생의 끝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설 땅이 없는 인생관을 움켜쥐고 세상을 산다면, 그와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비참해 질것입니다. 허무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심 없는 인생관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입니다. 어떤 면에는 일평생 후회하는 잘못된 인생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후회 없는 삶을 살길 원합니까?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원합니까? 처음보다 끝이 화려한 사람을 원합니까? 영원히 넘는 인생을 한번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인생관의 우선 순위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내 모든 관심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하나님 나라가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예수님의 사상이었고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더 가깝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대답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정확히 대답할 수 있으면 여러분의 관심은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빨리 정의가 내려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그만큼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흔히 천국을 이야기 합니다. 죽어서 들어가는 나라로 말합니다. 그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들어가는 천국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더 넓고 더 크고 더 높은 의미를 갖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통치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배를 곳입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영원히 예수님이 통치하실 나라입니다. 눅 1:33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예수님이 왕 노릇 하는 나라요, 영원히 이어질 나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물어온 제자들에게 7절에 무엇이라 주님이 말씀하십니까?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바 아니요” 무슨 말입니까? 아직도 세상에 관심을 가진 제자들을 다그치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회복은 하나님께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핵심을 말씀을 하십니다.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성령을 받기 위해 제자들이 할 일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그 일보다 더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4절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왜 우리에게 이 성령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증인의 삶이 성령의 인도 없이는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지금 부활하시고 이제 승천하실 주님이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4절에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여기 사도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어쩌면 그런 사람들만을 불러서-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 중에 한사람 가룟인 유다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먹었습니다. 어떻게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땅에 펼쳐 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3년 동안 끊임없이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가져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환상을 보든, 예언을 하든, 꿈을 꾸든, 이 세가지 표현은 한 가지 의미를 삼중으로 표현하며 강조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꿈이 있다는 겁니다.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잠 29:18의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꿈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꿈을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어떤 값을 치루고 있습니까?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던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이 없이, 비전이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의 꿈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수백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바라보면서 예언한 내용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병들고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갇힌 자가 놓임을 받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상처입고 고통 당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 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요, 이 꿈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꿈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다 가지고 있어야 되고 분명히 이 꿈을 먹고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꿈은 너무나 황홀한 꿈이기에 이 꿈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주님 앞에 나실인처럼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숨을 쉽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꿈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꿈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야망이나 세상적인 꿈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대로 그들은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를 거부했습니다. 두벌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생을 선택하고 그 가난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꿈은 황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꿈에 매료를 당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세상에서는 천대와 조롱과 멸시를 받던 제자들은 더 이상 땅의 것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한 명의 낙오지 외에 모두가 자신을 위해 몸 찢으시고 피 흘리신 생명의 예수를 위해 아낌없이 다 주를 위해 한 생을 믿음으로 살다 갔습니다. 저 하늘 나라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동성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여러분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하지 말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하고 싶든 아니든, 할 수 있든 없든 우리가 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시면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세상 나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덧없습니다. 아무리 호화로운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허무만이 남습니다. 하나님 나라 모르는 인생. 어떤 면에서 그것은 살아갈 가치 조차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소망적으로 자꾸 좋은 말 하려고 떠들 뿐, 우리가 영적으로 이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살고 싶은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있기에 오늘도 태산을 지나 험곡을 가도 찬송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하여 무언가 소명을 갖고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증인들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살 맛이 나는 것입니다. 가난하던 잘 살던, 못 살던, 잘났던, 못났던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벽돌 하나씩 옮기는 엄청남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세상을 사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에 40일을 더 계시면서 병 고치신 적이 없습니다. 먹는 기적을 베푸신 적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적도 없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계시면서 하신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아직도 세상 나라에 집중되지 않았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집, 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더 많이 가지고 더 재미있게 사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아닙니까? 관심을 바꾸세요. 가치를 새롭게 하세요. 우리의 전 삶을 바쳐서 얻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전 삶을 통해 전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