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민족적으로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지 71주년이 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개인이든, 단체이든, 사회이든 언제나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닙니다. 때로는 정말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기억들, 가슴 아픈 기억들, 고통스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들은 빨리 잊을수록 좋습니다. 그런 아픈 과거에 매여 있다보면 결코 앞을 향해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픈 과거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잊고 살아갈 때 그 잊어버림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손해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오늘 맞이하는 8.15 광복절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해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피를 흘려 자유를 찾으려고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늘 특히 복음을 받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바쳤던 주기철 목사님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소양 주기철 목사의 설교 가운데 그의 삶이 베여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 나 위해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의 어린 양'이란 뜻의 '소양'을 호로 가진 주기철 목사의 본명은 주기복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의 '기철'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자신의 이름처럼 평생 철저하게 믿음을 고수했습니다.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유학하며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은 주 목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결심합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주 목사는 양산읍교회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고, 졸업 이후엔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담임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담임 목회 당시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매일 새벽 산에 올라 기도에 힘썼습니다.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뒤엔 철저하게 복음만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광복'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더 우선돼야 함을 성도들에게 늘 강조했습니다. 주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와 일사각오의 설교 역시 이러한 마음이 바탕이 됐습니다. 일제는 주기철 목사의 이러한 모습을 자신들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 주 목사를 투옥시켰고, 이는 고난의 시작이자 죽음을 불러온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 장신대에서 교수로 주안 장로교회에 담임으로 계신 주승증 목사가 있는데 그는 주 목사님의 손자입니다.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님께서 감옥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은 것을 어느 날 공개 석상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정말 끔찍한 고문을 당하셨는데, 그 가운데 이런 고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길다란 꼬챙이를 가지고 요도에 쑤셔 넣습니다. 길다란 꼬챙이가 요도를 찌르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소변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소변을 보려고 하면 꼬챙이로 찌른 그 상처들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몇 시간씩 감옥 바닥을 뒹굴어야 했습니다. 또 대나무를 얇고 길게 깎아서 손톱 밑에다 찔러 넣습니다. 우리는 손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고통스러운데, 긴 대나무로 찌르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분이 당하셨던 고문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발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가락을 짓뭉개는 고문도 아닙니다. 손톱 아래 긴 대나무를 찔러 넣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은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3일이고 4일이고 잠을 재우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고문으로 인해 몸은 쇠약해져 있는데다 잠을 재우지 않는데, 며칠 잠을 자지 못하니까 정신이 혼미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이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을 배신하고 신사참배하겠노라고 말해버릴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참아냈습니다.
민족의 해방의 새벽이 오지 않을 듯한 상황이 계속 되자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일제의 무력 앞에 신사 참배와 그 보복에 두려움으로 신앙의 변절자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가까운 폭력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최후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 그리고 일사각오 극심한 고문과 폭력 앞에 타협지 않고 굳은 참 신앙의 모습을 몸소 한국교회에 보여주신 주기철 목사와 일사각오 많은 교회들이 신앙과 민족을 저버리고 있던 때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신앙의 삶이 될 것입니다.
부족한 종은 오늘 주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의성 감옥에 끌려가기 전에 산정현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했던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어려운 문장은 쉽게 표현했고, 긴 설교이기에 생략을 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 당시 설교했던 내용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 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피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 제자인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4)고 신신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자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으리요! 나와 여러분의 피, 억만! 죄인의 죄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도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핏방울은 땅도 감당할 수 없어, 지축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제 받는 고난, 길어야 70 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다. 지금 받는 고난은 어차피 한 번 죽어 썩을 몸이 죽는 것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불사의 몸이며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우리 앞에는 천국 가는 밝은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羞辱)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춘풍추우(春風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그리고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인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경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不肖) 이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4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한정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끓는 소리였습니다.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저의 자식도 부탁합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저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의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맡기나이다. 대목자장이신 예수님 손에 이들을 맡기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재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우리 주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漢)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까지 국궁진쇄(鞠躬盡鎖) 사이후이(死而後而), 즉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의도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 모두 그 고상한 인격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속한 이 땅, 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느라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니 용광로 같은 풀무불이 두려웁겠습니까! 예수를 사랑하니 굶주린 사자굴도 두렵지 않도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나라의 도미(都彌)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西海)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을 뫼 아래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겼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 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년 카르타고의 벨빼추어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천고(千古)의 열녀(烈女) 벨빼추어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 몸 죽고 죽어 열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주신 주님께 모두 감사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러나 이 땅에 그토록 원했던 해방을 맞이했지만, 주 목사님은 목사직을 제명당했고, 그의 가족은 정말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어느날 극동방송국에 부사장으로 계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주광조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년 4개월 만에 이 나라에 8. 15해방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족과 교회는 돌아가신 목사님을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수없이 닦아가며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의 어머니는 위암으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하루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돈과 남산동의 적산가옥문서 그리고 논밭문서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항일투사인 주기철 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 김일성이 보낸 포상금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곡하게 사절을 하며 주 목사님은 이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바랄뿐이요!“ 완강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자신은 마음에 커다란 갈등이 왔다고 합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돈이 저 재산이 필요한데…”
어머니는 그런 자기를 의식하였는지 그들이 돌아간 다음 아들을 앉혀놓고 성경구절을 찾아 읽으라고 했답니다. 시37:25-26절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은혜를 베풀므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도다. 사실 주 목사님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습니까? 그렇다고 가르치기를 했습니까?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이라고 배고픔과 원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일사각오입니다. 거기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유혹 앞에서도 그 집문서를 뿌리 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손자 가운데 인천에 건강한 교회인 주안 장로교회에 주승증 손자가 담임으로 청빙되고 그 후손은 이 땅에 구차한 인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은혜를 베풀므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도다! 기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