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교회는 영적 진단을 통해 우리가 건강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반드시 피해야 할 몇 가지 질병이 있는데,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그 질병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미 네 가지 질병을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로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병, 두 번째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병, 세 번째로 미성숙의 병, 네 번째로는 짐짓 죄를 범하는 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음의 종양인 쓴 뿌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사는 동안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병중에 종양이란 것이 있습니다. '종양'이란 의학용어로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생리적으로 무의미한 조직을 만드는 병'이라고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어느 한곳에 증식을 하는데, 전혀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생리적으로 무의미하게 자라나기만 하는 겁니다. 그것을 종양이라고 합니다. 종양에는 양성과 악성이 있습니다. 양성인 경우 간단히 수술만 하면 되는 것도 있고, 그냥 두어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악성입니다. 악성 종양은 급속도로 번져서 사람의 생명에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의 종양인 이 쓴 뿌리, 이 병이 어떤 병일까요? 본문에서 '쓴 뿌리가 어떤 병이다'라고 구체적인 말씀은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마음의 종양을 '쓴 뿌리'라 표현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이 단어 자체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두면 썩은 쓴 뿌리에서 속아내지 않으면 썩은 쓴 열매가 나옵니다. 바로 이런 쓴 뿌리의 속성을 본문 15절에 기가 막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무슨 말입니까? 만약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은혜 속에 잠기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쓴 뿌리로 인하여 더러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쓴 뿌리가 일어나면 은혜를 받는 것을 막습니다. 쓴 뿌리가 있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마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등을 돌리게 됩니다. 드디어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스스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결과입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쓴 뿌리가 있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더럽히는 무서운 독소를 뿜어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를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뽑아내야 합니다.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하지 않으면 쓴 뿌리는 계속 자라게 됩니다. 그렇다면 쓴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쓴 뿌리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병도 자각증상이 없는 게 더 큰 문제 아닙니까? 암 같은 무서운 질병이 왜 우리에게 치명적이냐 하면 자각 증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우 가운데 멀쩡하던 분이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고 제대로 손도 못써본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기에 증세가 나타나면 쉽게 고칠 수가 있는데, 다 퍼진 다음에야 알게 되니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내 영혼을 병들게 만들고, 내 삶을 거칠게 만드는 이 쓴 뿌리가 나를 지배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14절의 말씀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 먼저 이 쓴 뿌리가 자라게 되면 화평의 삶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엡 2:14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화평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후 5:18절에 보면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화평케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NIV 영어성경을 보면 ‘화평케 하는 자’를 ‘Peace-maker’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평화를 만들어 내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Peace-maker’가 있는가 하면, 불화케 하는 ‘Trouble-maker’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화평케 하는 ‘Peace-maker’입니까? 아니면 불화케 하는 ‘Trouble-maker’입니까? 만약 가는 곳마다 다툼과 갈등과 분열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Trouble-maker’입니다. 마5:8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진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화를 가져오는 사람은 그 속성상 마귀의 아들이라 불러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았답니다. 서로 미워합니다. 어느 날 말다툼을 하다 기어이 충돌합니다. 치고 받고 싸우다가 센 물고기가 약한 물고기를 물어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물고기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연못에는 죽은 물고기가 썩어 악취가 나게 되었고, 남은 물고기는 병이 듭니다. 마침내 그것도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풍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의견만 내세우고, 자기 욕심만 주장하면 갈등과 다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둘 다 죽는 겁니다. 이 화목하게 하는 삶은 반드시 자기희생이 들어갑니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쓴 뿌리가 일어나면 머무는 곳마다 분열과 다틈이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멈추어졌기 때문에 늘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주변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고통과 상처를 줍니다.
2. 거룩이 깨집니다. 왜 아브라함을 익숙한 땅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했습니까? 거룩한 삶 때문입니다. 그동안 익숙해진 삶으로부터 결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별된 삶입니다. 똑같은 모양의 기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집에서 사용하는 것과 성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성전에서 쓰이는 모든 것을 성물(聖物) 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별되었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성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도(聖徒)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백성, 거룩한 무리라는 말입니다. 이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체험했고,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한 순간에 바뀌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상실한 곳에 자란 쓴 뿌리는 6절에 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먼저 음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음행이란 성적인 타락입니다. 상담학자들이 성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그 원인의 대부분이 어릴 적 마음의 상처라고 합니다. 어떤 여자들은 도저히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계속 다른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져야 됩니다. 어떤 남자들은 계속해서 다른 이성을 찾아다녀요. 상담학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취급합니다.
다음은 망령된 자입니다. 에서와 같이 망령됩니다. '망령되다'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되는데 에서의 경우를 들면 확연해집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과 하나님의 장자권을 팔았어요. 망령된 것은 영적이지 못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축복보다, 또 우리가 받은 구원보다 이 땅의 물질과 명예와 성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에서와 상관없어! 이건 내 설교가 아니야!"하고 눈을 감고 계신 분이 있다면, 잘 들으세요. 이 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늘의 것보다 이 땅의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에서와 같은 사람이요, 망령된 자인 것입니다. 이 영권보다 세상 물질에 내 인생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누구도 이 쓴 뿌리에 대해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암 전문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이 암 세포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암세포를 이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암이라고 진단을 받고 수술 받아야 할 사람은 수술을 할 때 암세포가 퍼져있는 곳을 철저하게 도려내야 합니다. 만일 암세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 남아 있는 암세포 때문에 다시금 암이 재발하게 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버릴 때에는 철저하게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죄의 세포가 남아 있으면 그 작은 세포 하나 때문에 그 문화와 삶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으로 물들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결심하고 다짐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것을 극복했다 할지라도 또 다른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백화점의 품목보다 더 많은 죄를 일일이 종류에 따라 싸워 이기려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원함은 있지만 그렇게 살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믿음 좋은 바울도 이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깊은 탄식을 합니다. 롬 7:24절에「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여기에서 ‘곤고함’은 원문에 의하면 완전히 파산한 상태를 말합니다.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탄식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울이 율법 아래에 있었을 때는 이런 탄식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를 강화시키고 의롭게 포장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비난하고 정죄하기에 바빴지, 자신에 대해 이렇게 탄식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은 은혜 아래에서가 아니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미화하며 괜찮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것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얼마나 절망해보셨습니까? 우리는 자칫하면 가면을 쓰고 다양한 종교적인 의로 자기를 그럴듯하게 꾸미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고, 무엇인가 다 된 사람처럼 장담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가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을 때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 섬긴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믿기는 했지만 자신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파산한 상태입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라는 철저한 자기 부정, 자기에 대해 완전히 깨질수록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상처가 다 쓴 뿌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환경이 중요한가, 반응이 중요한가? 저는 성경이 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기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어려움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마음에 쓴 뿌리가 자라는 반면 또 다른 이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상당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네노 다쓰히'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리나라에도 오셔서 잠실 경기장에 와서 집회도 인도하신 요도바시 교회를 담임하시는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1000명이 넘는 성도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영성과 또한 지성을 겸비한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그런 분이였지만, 그가 쓴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책을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볼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색잡기에 빠져 있는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 그의 가슴 안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에 가득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낮과 밤이 다른 이중인격자였답니다. 낮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가까이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였고 직장 동료들한테 언제나 신뢰와 인정을 한 몸에 받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유능하고 점잖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집에 들어올 때면, 술에 취해 아무 여자나 데리고 들어와 어머니와 자식 앞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온갖 추한 해동을 저질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져, 어머니는 그 앞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자신도 괴물처럼 변해버린 아버지를 피해 벽장 속에 숨어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런 시절을 보낸 그에겐 오직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뿐이었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자란 자신이 목사가 되어 하나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고"는 표현을 할 정도였습니다. 여기까지 온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분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 그런 고통과 상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옆문을 열고 그 뒷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그도 진한 고통과 아픔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상처가 다 마음에 쓴 뿌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이네노 다쓰히'라는 목사님이 어릴 때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자기 마음에 쓴뿌리가 되게 하기보다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그 상처를 치유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계기로 삼은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하다고 성경은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상처를 치유하는가, 아니면 쓴 뿌리를 키우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상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불행한 과거를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훌륭한 부모님을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 가난하게 살았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환경으로부터 그 상처를 치유하는가, 아니면 쓴 뿌리를 키우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어릴 때 받은 상처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아 오셨나요? 아니면 여러분 마음속에 그 상처로 말미암아 쓴 뿌리를 키워 오셨나요? 누구나 다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자식 때문에 우리에게 탄식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생활 때문에 오는 부부간의 상처가 있지 않습니까? 사랑했던 연인에게 당한 상처가 도져서 그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분, 또 질병 때문에 그 고통으로 그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죄 때문에 받은 상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을 향해서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의 한 심지와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쓴 뿌리에 마음에 뒤덮히면 가지고도 놓친 인생이 되고 맙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란 책을 쓴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은 우리 마음을 정원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정원에 오셔서 산책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 마음의 정원에 잡초가 가득하여 아름다운 정원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오시기 꺼려하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쓴 뿌리가 지배하지 않기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놓으셨던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과 은혜가 가득할 때 우리 마음의 정원에는 잡초의 씨앗들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여기 다시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무슨 말입니까? 은혜 없인 이 은혜라는 면역체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채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 영혼을 병들게 만들고, 내 삶을 거칠게 만드는 이 쓴 뿌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제거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의 쓴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이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셔야 할 인생의 쓴 뿌리의 독을 십자가에서 대신 마시셨습니다. 암환자가 항암제를 투여해서 그 암을 죽이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 쓴 뿌리는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항상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시므로 우리의 영적인 병, 정신적인 병, 육체의 모든 병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피의 능력을 힘입을 때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는 것들, 이 쓴 뿌리가 제거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항상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시므로 우리의 영적인 병, 정신적인 병, 육체의 모든 병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축복의 통로를 열어주셨습니다. 지금 인생 가운데 독초와 쑥의 열매를 거두어 괴롭고 고통 받는 삶을 사는 분들이 계시다면 예수님께 나아가 죄를 고하시고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축복의 길, 영원한 행복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젖과 꿀의 열매를 거두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