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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31 짐짓 죄를 짓는 병 (히10:26-3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7-31 | 조회: 1974

짐짓 죄를 짓는 병 10:26-39. 2016. 7/31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3월에 공동 발표한 깨진 유리창이란 글에 처음 소개한 것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해 두면 지나가는 행인들이 버려진 건물이라 생각하고 거기에 쓰레기를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건물은 점점 더 더러워진 장소가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연스레 범죄의 장소가 되고 맙니다. 그건 비단 깨진 유리창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곳에 작은 쓰레기가 하나 놓였는데 그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거기에 쓰레기를 하나둘 버리게 되면서 그곳이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쓰레기와 같은 죄가 우리 안에 남아 있으면 그것이 점점 더 큰 죄를 만들어내게 되고, 우리 안에 작은 허물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면 우리 안에 더 많은 허물로 채워지는 것은 쉬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와 허물이 있을 때 그것을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더욱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가 구원받은 후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반드시 피해야 할 몇 가지 질병이 있는데,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그 질병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미 세 가지 질병을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로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병, 두 번째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병, 세 번째로 미성숙의 병, 네 번째로 오늘 설교할 짐짓 죄를 범하는 병입니다. 이 병은 조금 어려운 병이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가 피해야 할 중요한 병입니다. 짐짓 죄를 짓는 병!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데 가장 심각한 병이 있다면 오늘 함께 나눌 짐짓 죄를 짓는 병일 것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우리의 신앙은 자라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에 대해 잘 알아야 하기에 먼저 진단을 해 보겠습니다. 짐짓 죄란 과연 무엇인가?


구약에 민15:27-31절까지 보면 이 짐짓 죄가 나옵니다. "만일 한 사람이 부지중에(그릇 범죄 하거든) 일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부지중에(그릇 범죄)한 사람이 그릇하여 여호와 앞에 얻은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든지 무릇 부지중에(그릇 범죄)한 자에게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고의로(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 여기 부지중이란 말과 고의라는 말은 과거 개혁 한글에 그릇과 짐짓으로 나온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종류의 범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우리가 짓는 죄 가운데는 부지중에(그릇) 범하는 죄와 고의로(짐짓) 범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그릇 범하는 죄는 사함을 얻을 수 있지만, 짐짓 범하는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릇 범하는 죄를 먼저 알아봅시다. 이 죄는 내가 약하여 짓는 죄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고 싶은데 어쩌다 보니까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 이것은 의도적인 범죄가 아닙니다. 죄를 짓기 싫었지만 내가 너무나 약해서 어쩔 수 없이 지은 죄입니다. 우리가 그릇 범죄 할 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용서를 구할 때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짐짓 죄를 범할 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용서함을 얻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짐짓 범하는 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기 쉬운 단어로 이야기하면 고의적인 죄, 의도적인 죄, 죄 짓기로 작정하고 지은 죄입니다. 한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죄 지을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순간 화를 내다가도, 한순간 유혹이 느껴 죄를 짓다가도 성령께서 내게 찔러주시면 그 죄를 중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짓 죄는 그런 죄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이것은 죄라고 가르쳐 주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을 무시해버리고 계획적이며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겁니다. 구체적이고 철저히 계획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이런 짐짓 죄를 범해서 하나님 앞에 끊쳐진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그의 동생 아벨이 같이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가인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것을 본 가인의 마음에 분노가 생기고 무언가 계획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의도적인 계획, 잘못된 짐짓 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가인을 말리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4장에 보면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를 받자 가인이 얼마나 불쾌했는지 모릅니다. "가인아, 네가 성냄은 어쩜이뇨? 네 안색이 변함은 어쩜이냐?"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선을 행치 못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여기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히브리어로 '엎드린다'라는 단어를 사자와 같은 맹수가 자기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풀숲이나 바위 뒤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모습을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가인은 사냥꾼이기 때문에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을 겁니다.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면, 선으로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죄가 네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충고하십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질투로 말미암아 아벨을 죽여야겠다는 가인의 마음속을 읽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오셔서 경고를 하시지만, 그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해버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켜 나갑니다. 어느 날 동생에게 들에 나가자고 얘기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벨이 들로 따라 나가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짐짓 죄라고 얘기합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일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계획을 했습니다. 한 장소를 정했고, 마음속에 오랫동안 동생을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어요. 그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찾아오셔서 깨우쳐 주셨어요. 너는 그 마음을 버리라고 권면하셨어요. 그런데 가인은 그 모든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해버리고 자기가 의도한 대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의적인 죄,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죄입니다. 본문 26절을 읽어봅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우리가'에는 히브리 저자가 포함됩니다. 이는 우리도 포함될 가능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고 했어요. 여기서 '지식'이란 단어가 특별한 단어입니다. 헬라어에는 지식이란 단어가 두 개 있는데 '그노시스(일반적인 지식)''에티그노시스(구체적인 지식)'입니다. 여기에서는 후자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더라!" 하는 이 정도의 지식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확연히 들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죄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간 사실을 내가 받았어요. 이러이러한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그 교훈을 받아들였어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내가 아무리 구체적으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를 받은 후에도 짐짓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기자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알고 있으나 계획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가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완벽한 존재로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죄를 짓기도 하고, 허물을 끌어안고 살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가 그들도 모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실수하고 허물을 가진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도 그의 일생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겪으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 역시 참 많은 허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던 다윗도 살인교사죄와 간음죄라고 하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라고 칭송을 받고 있는 사도 바울 역시 급한 성격 때문에 때론 실수하곤 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훌륭한 사역을 감당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수하고 죄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는 연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묻습니다. 어떻게 할 때 이런 짐짓 죄의 병에 걸리게 될까요? 이 무서운 병, 가인이 걸렸던 병, 용서받을 수 없는 이 엄청난 죄악을 어떠한 경우에 지을 수 있는가? 29절은 그 원인을 세 가지로 정확하게 얘기해 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여기 보면 왜 의도적인 죄를 짓게 되는가? 왜 짐짓 죄를 짓게 되는가? 성경은 그 이유로 믿음의 태도에 문�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구원받았으나 우리의 믿음의 태도에 문제가 생길 때 이런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겁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을 때

여기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발 아래 둔다는 뜻입니다. 발로 짓밟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삶의 우선 순위와 주권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고 항상 내 유익에 둔다는 겁니다. 언제나 나의 유익이 우선이고 내가 주인인 겁니다. 내 마음의 보좌 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는 겁니다. 내 생의 주인은 나요, 내 돈의 주인도 나요, 내 시간의 주인도 나입니다. 굉장히 헌신하고 믿음생활 하는 것 같는데 그 마음을 벗겨보면 마음의 보좌에는 내가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내 발 밑에 두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짐짓 죄를 짓는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겁니다.


2.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할 때

언약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보혈을 흘린 이유를 단 하나로 말한다면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죄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하나님께서 보좌 위의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속죄 제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렸겠습니까?


한 부흥사가 죄의 심각성과 무게에 대해 강조한 설교를 했어요. 부흥회 후에 한 청년이 찾아왔어요. "목사님의 설교 중에 언급한 죄의 무게를 도저히 이해 못하겠어요. 죄의 무게가 몇 킬로나 나갑니까?" 하고 물었어요. 부흥강사가 대답하기를 "시체 위에 200킬로를 올려놓는다고 그 시체가 무게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어요. 이 청년이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뜻을 알 것 같았어요. 내가 왜 죄에 민감하지 못한 줄 아십니까? 내 영이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지가 마비되어 버린 사람에게 몇 백 킬로의 짐을 올려놓아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할 때 나도 모르게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할 때

여러분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탄식 소리를 한번 들어보셨나요? 저는 들어보았어요. 어느 날 제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고민할 때 성령님의 한숨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잘못할 때, 불순종할 때 우리 마음속에서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2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때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시며 대신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나를 지도하시고 이끄십니다. 그 성령님의 음성을 내가 자꾸만 거역하는 것, 무관심 하는 것, 성령님의 근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의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이 병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한 가지 확연한 결과를 성경은 말씀해 주십니다. 27, 30-31절을 봅시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짐짓 짓는 죄를 범하게 될 때, 우리 앞에 확실한 것은 심판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을 사는 세대에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을 너무 은혜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손에 빠져드는 것보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빠져드는 것이 더 무서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실 때 그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무서움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초두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막 탄생했을 때 한 집사 부부가 죄를 범했어요. 우리가 볼 때 별로 큰 죄 같지 않습니다. 헌금하다가 죽었어요. 아나 니아와 삽비라입니다. 마치 한국에 IMF가 오듯이 그때 가난한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목회자와 사도들이 교회 앞에 이런 광고를 한 것 같습니다.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여러분 중에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재산을 좀 팔아서 교회에 헌금을 하시면 구호헌금으로 쓰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했습니다.


그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모의를 했어요. 5억짜리 아파트가 있었어요. 그것을 팔아서 25천을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그리고 아파트 한 채 값을 다 드린 것처럼 교회 앞에 광고를 했어요. 그때 베드로가 그 헌금을 가져온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헌금이 다냐?" ""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베드로가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속였느냐!" 이 일로 아나니아가 죽습니다. 그를 장사하고 나왔는데, 그 아내가 동일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여인도 죽이십니다. 무엇을 가르치기 위함일까요? 하나님의 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 죄가 왜 심각합니까? 이 죄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교회는 무너져 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짐짓 짓는 죄를 지으며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아름답게 예배를 드립니다. 거룩한 찬양을 하고 봉사를 합니다. 그러나 돌아가서는 그 마음속에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죄를 마음에 품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것이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죄에서 돌이켜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정죄를 선포하기 위함이 아니요, 병을 고치기 위함입니다. 돌이키라는 겁니다.

1. 32절에 보면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32) 여기서 '생각한다', '아나밈네스코' 이 단어는 그저 추억으로 이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배우고 지식으로 체험한 것들을 깊이 묵상하는 겁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고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 후에 교회에서 마련을 해 준 남한산성에 사택에서 생활을 했는데 당시 교계 중진들이 목사님을 찾아 뵌 적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어느 목사님이 목사님 저희들에게 덕담 한 마디만 해 주세요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 믿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에게 예수를 잘 믿으라니, 잘못 오해해서 들으면 상처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이 말은 목회하는 나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이미 예수 믿는 목사님들에게 예수 잘 믿으세요 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말은 우리가 회복하여야 할 신앙의 기본기, 우리가 되찾아야 할 주님과 나의 첫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지적해주는 귀한 충고의 말씀입니다.


2. 35, 3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 죄를 짓고 싶을 때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어떤 유혹의 순간을 바라볼 때 인간인지라 그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러나 이것을 막아내야 합니다. 인내로써 막아내야 합니다. 인내는 내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 이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 앞에 맡기는 것입니다.


3. 37-39절을 보세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짐짓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마십시오. 내가 하고 싶다고 다 하고, 먹고 싶다고 다 먹고, 말하고 싶다고 다 말하고... 여러분,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소욕을 누르시고 저 천국의 상을 바라보시면서 오늘 하루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십시다.


우리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빠질 사람들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는 엄청난 보화가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담대함을 얻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의 고난의 때를 통과한 다음 우리에게 주어질 엄청난 보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 보화를 34절에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빼앗긴 것보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고난의 큰 싸움에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힘들다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일어섭니다. 다시 일어나 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어리석은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 실수도 하고, 때로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수없이 많은 허물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핑계를 대고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산다면 그의 인생은 멸망으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연약한 인간임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그대로 갖고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실수나 허물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건물로 비유한다면 우리 인생에 하자보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어떤 건물을 아무리 훌륭하고 멋지게 잘 지었다 하더라도 그 건물에 이상이 생기면 그 건물을 보수해야 합니다.


이상(하자)가 생겼을 때 그것을 고치는 것을 하자보수라고 말합니다. 우리네 인생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하고 멋지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에 분명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 인생에 하자보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자보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을 때 보수를 해야 합니다. 그 때를 놓치고 보수를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자보수를 하는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서 무엇이 잘못되었는 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건물을 잘 지어놓았다 하더라도 이상이 생기면 고쳐야 합니다. 멋지게 지어졌다는 것에만 감탄하고 이상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 건물은 내부적으로 문제가 더욱 커지게 되고, 언젠가는 삼풍백화점이 그런 것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과 내 모습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실수와 허물이 있는지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을 바라보며 신앙생활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눈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고 포기하거나 빼앗긴 것보다 더 크고 영원한 하늘의 것이 보이십니까? 이 은혜 앞에 날마다 강건한 삶이 우리 안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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