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가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젊은 여성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 드신 어르신들과 어린 아이들까지도 아름답고 예뻐지고 싶은 욕망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예뻐지고 싶은 욕망이 ‘성형수술’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실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성형수술은 일부 특수한 사람만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타고난 얼굴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간에 그대로 가지고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쌍꺼풀 수술과 같은 것은 감기 치료하듯 하는 세상 아닙니까? 그래서 대학가에서는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되면 친구들이 서로를 잘 몰라본답니다. 성형수술로 얼굴을 너무 많이 고쳐버려서 친구들도 서로를 몰라볼 정도라고 합니다.
심지어 요즘은 천국에도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많은 사람들이 천국문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답니다. 천국에 갈 사람들도 너무 많이 얼굴을 뜯어 고쳐서 얼굴만 가지고는 그가 천국에 갈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느라 길게 줄을 서 있다는 것입니다. 총각들 - 결혼할 여자 볼 때에 절대로 얼굴은 믿지 마세요. 2세를 낳아볼 때까지는 그 얼굴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얼굴을 바꾸려고 합니까? 자기 스스로 볼 때에 자신 없던 부분을 예쁘게 고치면 자신감이 생겨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얼굴을 바꾼다고 인생이 바꿔지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처럼 얼굴을 바꾸어도 내 인생이 연예인이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바꾸면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모가 유명 배우처럼 바뀌어지면 자신의 인생도 유명 배우처럼 바꿔질 것으로 착각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외모가 바뀌었다고 인생이 바뀌거나 인격이 바꿔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성형수술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려면 그의 생각이 바꿔져야 하고, 그의 감성이 바꿔져야 하고, 가치관이 바꿔져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잠언 말씀에서, 잠4:23절에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생명의 근원이 외모와 육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얼굴은 아름답고, 몸매는 누구에게 빠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외모를 가졌지만, 그 마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과 사회가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음을 완고케 하는 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이 성숙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의 중요한 질병 하나를 고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완고케 하는 병입니다. 이 히브리서 3장에는 이 완고라는 단어가 3회나 나옵니다. 8을 읽어봅시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13절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또 15절에도 절대로 너희 마음을 완고케 하지 말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도대체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병이 무엇일까요? '완고하다'는 단어는 '딱딱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Hardness, 딱딱함이라고 표현합니다. 국어사전에는 ‘완고’란 단어를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센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말이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며 도리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딤 전4:2절에서 유사한 단어를 사용했는데, '양심에 화인(火印)맞은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화인'이란 단어는 화상입니다. 피부에 심하게 화상을 입으면 흉터가 생깁니다. 그 흉터는 감각을 잃어버려 만져도 잘 모릅니다. 바로 이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마음이 완고해진다는 말은 무감각해진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그 몸이 굳어지기 쉽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성인병은 굳어지는 병이기도 합니다. 뇌경색이라든지, 심근경색, 그리고 간경화나 동맥경화등을 보면 특징이 무엇입니까?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경화나 경색이라는 말은 혈관이 혈전 따위로 막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경색이 무서운 것은 결정적인 고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정상처럼 보이다가 일단 조짐이 시작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간경화가 얼마나 무서운 질병입니까? 간은 원래 부드러워서 영양분을 잘 저장하고 자기 기능을 잘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이 어떤 연유로 인해 딱딱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 기능을 못하는 상태를 간경화라고 합니다. 병중에서 심각한 질병입니다. 그런데 더욱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 굳어지는 심령경화증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희 마음을 절대로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강퍅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지요? 바로 애굽에서 모세를 따라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고한 사람들의 대표로 성경에서 거론을 하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 할 백성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잘 믿지 않고 마음이 완악해 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완고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이토록 우리에게 완고해져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1.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집니다.
이렇게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두 가지 엄중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12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마음이 완고하게 되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을 잃는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은, 구원은 받았지만 이 땅을 살아갈 때 생명 되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과 소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전혀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아무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진 자입니다.
겨울에 산에 가보면 나뭇가지가 똑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겉은 똑같아 보이지만, 속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른 가지들이 한 나무에 달려있습니다. 한 가지는 생명이 있는 가지요, 한 가지는 생명에서 떨어진 가지입니다. 그것이 언제 결판이 납니까? 봄이 되면 납니다. 우리 눈에 똑같이 보여도 생명 있는 가지는 봄에 싹을 내는 법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가지는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도 마른 채로 있습니다. 농부가 나아와 그 가지를 잘라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매 없는 가지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저와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이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는 것 같은데, 구원은 받은 것 같은데, 하나님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2.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11절을 보세요.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는 19절에서도 강조합니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 마음이 완고해지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한 겁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잘못 해석하여 '가나안'을 '구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했을 때 이미 구원은 받은 겁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은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이후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축복의 삶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읽어보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너희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또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 안식은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의 신분이 안식에 들어간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안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떤 안식일까요? 이 땅에 사는 동안 구원받은 기쁨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놀라운 삶인 줄 믿습니다. 우리 마음이 완고하게 되면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고 교회에 나오고는 있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전혀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없는 삶! 이것이 우리 마음이 완고하게 될 때 생겨나는 무시무시한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가끔 기뻐합니다. 이유는 사업이 잘되어서 기쁜 겁니다. 낙심합니다. 이유는 사업이 망했어요.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안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불행한 삶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 포함 된 16-19절을 보시면,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 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함께 출애굽한 그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로서는 결코 매력적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 어떤 것도 제공할 수 없는 절망의 땅,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고통의 땅에서 하루 이틀도 아닌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목마를 때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비처럼 내리고 메추라기 떼가 먹을 것이 되고, 바위에서 샘물이 나고, 원수가 공격했을 때 그 원수를 물리친 것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가장 중요한 버팀목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됨으로 약속의 기업을 놓치는 것은 오랫동안 준비하고 힘들게 오른 산의 정상을 바로 눈 앞에 두고 발을 헛디뎌 실족하여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의 다리에 쥐가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쥐난 부분 즉 경직되고 굳어진 다리 근육을 빨리 풀어주어야 합니다. 저도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난 적이 있는데 반사적으로 일어나 다리를 주무르게 되더라고요.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완고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무엇을 주물러야 할까요? 마음을 주물러야 합니다. 주물러야만 마음이 부드럽게 됩니다. 부드럽게 된 마음. 무엇이지요? 온유함입니다. 완고함이 우리의 마음에 생기기 않도록 온유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 부분인 히브리서 3:1-6에는 두 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오, 한 분은 모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고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 즉 종으로서 충성하였습니다. 마음이 완고해서는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충성하기 위해서는 온유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모세는 정말로 대표적인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온유했다고 민수기 12:3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우리는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마태복음 5:5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37:11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도다’고 말씀합니다. 힘들고 어렵다 보면 자칫 잘못하면 마음이 굳어지기가 쉽습니다. 경직됩니다. 귀찮아집니다. 예민해집니다. 날카로와집니다. 불만과 불평이 생기게 쉽습니다. 부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공격적이 됩니다. 우리는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 나에게 있다할찌라도 온유합시다. 온유하게 생각하고 온유하게 말하고 온유한 모습을 보이고 온유하게 행하고 온유하게 대합시다.
이는 우리의 힘으로 안 됩니다.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이 완고해지는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히3:14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확신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내 마음에 잘 밖힌 못처럼 견고히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고든 맥도널드 목사님은 그의 책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에서 우리 사람의 내면을 정원에 비유하고 하고 있습니다. 정원을 잘 가꾸어야 사람들이 들어와 쉬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그렇게 잘 가꾸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정원에 멋있는 정원수를 심어놓았다 하더라도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면 나무들 역시 제대로 자랄 수가 없을뿐더러, 정원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잡초들을 방치해 놓으면 그 정원은 들어가기 싫은 곳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런 정원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원에 잡초들이 무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와 거하기 싫어하시고, 우리 역시 우리 마음의 정원에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정원을 깨끗하게 가꾸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잡초를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힘 만으로 하려 하면 힘들고 지쳐 그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잡초로 가득 찬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하려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을 우리 마음의 정원에 정원지기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의 정원에 정원지기가 되신다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입니다. 정원지기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정원을 잘 가꾸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가 가운데 한 분인 헨리 나우웬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50여권의 책을 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교수였습니다. 이런 그가 어 느날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 들어가 장애아들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은 중증 장애아 6명과 봉사자 4명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입니다. 나우웬은 그곳에서 아담이라는 지체장애와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청년을 도왔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아침 아담을 깨워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히고 밥 먹는 것을 도와주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그의 친구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느냐?” 하는 말이었습니다. ‘당신같이 유능한 사람이 이런 곳에서 이렇게 하찮은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당신은 유능한 학생들을 가르쳐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우웬 박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를 닦아주고,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빗겨 주고, 옷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는 제 맘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만도 두 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아담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수고하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나우웬은 그 아담을 통해 자기를 본 것입니다. 나우웬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돌보는 아담이라는 아이는 내 친구요, 선생이요, 영적 지도자이며 나의 목사이다... 매일 아담과 보내는 두 시간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를 듣는다. 그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해 주어도 감사표시나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 그 아담을 통해 자신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온 자신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이 굳어 있진 않습니까? 마음이 말라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겔 11:19-20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마음이 돌처럼 굳은 마음입니다. 이웃의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이 돌처럼 메마른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름다운 열매로 맺혀집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함께 울지 않는 메마른 마음에 성령의 단비를 통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에 행복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그 부드러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완고함의 질병은 결국 내 삶을 망가뜨리고 마귀의 도구로 비참한 인생을 맞게 됩니다. 이 질병에서 이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 시간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 마음에 잡초가 났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도와주세요!" "하나님, 내 마음에 지금 시험이 들었어요. 미움이 싹트고 있어요. 시기가 자라납니다."라는 마음을 솔직히 오픈(open)하는 기도! 목장에 가지고 가서 이런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마음을 가꾸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에 간경화처럼 마음이 굳어지면 그래서 영적으로 병이 들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주의 말씀으로 마음을 가꾸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 옥토 밭이 되어 주님의 축복을 한 몸에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