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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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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10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병 (히 2: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6-07-10 | 조회: 1804


이 땅에 살면서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 건강의 중요성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부귀, 지위, 모든 것이 다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질병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의 건강도 잘 체크를 하셔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쳐 복종하고 날마다 죽노라는 자세로 평생 겸손하게 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안 그러면 무너집니다. 영적이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반드시 피해야 할 병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저는 7월 한 달 동안 히브리서를 중심으로 영적 건강을 위해 피해야 할 몇 가지 질병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3절에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 이것은 심각한 병입니다. 3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여기 큰 구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큰 구원이라면 작은 구원이 또 있는 것인가?”, “크다면 도대체 얼마나 큰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장엄한 구원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구원이요, 확실하고도 완벽한 구원이라는 뜻의 감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다는 말은 무관심하다라는 말입니다. 나와 직접 관계가 없는 것처럼 방치하거나 내 버려둔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타가 대부분 인정하는 어리석은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그것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잃어버려 손에서 떠나게 되면, 그때서야 ', 그토록 소중한 것을 미처 몰랐구나! ' 하고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받은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요즘처럼 폭염이 기승부리는 더위 속에 사람들이 산으로 바다로 간다고 떠드는 데도 이 놀러 가기 좋은 세상을 뒤로하고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경배하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은 보통 사건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이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마운 것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고 입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구원 받은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을 잘 못합니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담대하게, 기분 좋게 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좋아야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결론은 나에게 별로 안 좋다는 말입니다. 나 역시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남에게 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야 이미 발목이 잡혔으니 어쩔 수 없지만, 괜히 상대방에게 말해서 젊은 시절에 놀지도 못하고 교회에 끌어다가 예배드리게 하면 그것도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내가 예수 믿는데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이러한 점을 고쳐주시고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도다여기 '유념함으로'라는 단어는 '주의를 기울이다' 라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강사들이 연단에 올라가 가장 많이 쓰는 용어가운데 하나기 "저에게 주의를 집중해 주시겠습니까? (May I have you attention please!)" Attention(주의)입니다. 여기서는 유념함으로 번역했지만, 사실은 주의를 집중시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 것을 성경은 영혼의 심각한 질병이라고 얘기합니다. 복음을 모른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날마다 나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습니다. 복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명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없습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땅의 삶과 나의 건강, 사업과 그 무엇이 복음보다 위에 있고 복음은 뒷전에 있는 것을 가리켜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질병이라고 하나님은 진단하시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게 되면 증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라리아에 걸리면 고열이 납니다. 식중독에 걸리면 배가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병에 걸려도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등한히 여기겠습니까?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도다 여기 '흘러 떠내려가다''파라로멘'이란 단어입니다.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세 가지 의미로 이 단어를 썼어요. '배가 정처 없이 물결을 따라 떠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반지 같은 것이 손가락에서 빠져나간다'는 뜻입니다. '항아리가 깨져서 물이 다 새나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방향을 잃고 방황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 매일 나와 예배를 드리고, 직분을 가지고 교회에서 충성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땅에만 관심을 가져서 내 영혼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질병에 걸리게 되면 - 내 인생은 방황할 수밖에 없고, 훗날 인생결산할 때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후회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데 교인들처럼 살았다하나 죽은 자로 진단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주님이 너무 역겨워서 토하여 내치고 싶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과 구원을 등한히 여길 때,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이 언젠가 흘러 떠내려가 버린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 질병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 구원을 등한시하면 그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첫째가 복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도 농담과 세상 상식을 얘기하면 아주 좋아하다가, 십자가 얘기를 하면 표정이 달라집니다. 반대로 관심을 끄는 사람도 있어요. 십자가 복음의 '복음' 소리만 들어도 우리 마음에 감동이 넘쳐야 할 줄 믿습니다. 만약 우리들 가운데 '십자가 설교'하는 것을 불편해 하며, 복음 전하기를 싫어하는 증세가 있다면,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질병에 나도 모르게 걸린 겁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영혼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봅시다. 동성 교회에 어떤 사람이 옵니다. 그 사람을 관찰하기를, 직업이 무엇인가? 어떤 차를 타고 왔는가? 재산이 얼마이며,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뿐 저 사람이 힘들게 왔는데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저 사람이 오늘 죽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에 대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면 하나의 사회단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세 째로 현실에 집착하게 됩니다.

관심이 늘 땅의 것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할까 해서 모이면 운동에 관해, 몸에 좋다는 약에 관해 얘기합니다. 물론 이런 얘기도 해야 하지만, 그것만 얘기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감격을 나누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승리하신 간증을 나누어야 하는데, 만나면 물질 얘기하고 관심이 늘 사업에 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승진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리면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갈 것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의 관심이 땅에 있을 때, 이것은 내가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복음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주위 사람의 영혼에 대해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땅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오늘 조기발견 하시기 바랍니다. 암도 그렇습니다. 조기발견만 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들어온, 깨닫지 못하는 영혼의 무서운 질병이 싹트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 말씀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해요. 별로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독생자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셨고(2:17), 선물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에서 건지시고, 자녀의 권세를 주시며,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을 등한시 여기지 않으려면

 

1. 점검이 필요합니다.

마치 몸이 이상이 오면 병원에서 MRI나 엑스레이로 몸 안에 고장 난 것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구보다 깊이 알았던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시116:11-12절에 그는 구원의 감격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2-14) 이 말씀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 속에 감격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기쁨이 차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너무 고맙고 좋아서 어찌 할 줄을 모르는 모습을 눈 앞에 그릴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감격과 기쁨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을 앉혀놓고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겠다.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니라.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너희를 떠나도 너희 가슴 속에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그 무엇이 와도 이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이것이 무슨 기쁨입니까? 바로 구원의 기쁨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쁨을 가지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이 기쁨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매를 맞고 나오면서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에 있던지 성전에 있던지 기쁨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가르쳤다고 사도행전 5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큰 기쁨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하려면 '내가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감격과 기쁨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뜨거울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그것이 미지근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 기쁨이 항상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시편 51편에 보면 위대한 성군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중에 권력 기반이 잘 닦이고, 힘을 쓰기 시작하자 못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왕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못된 죄악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얼마나 회개하느라고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52:12) 그가 범죄하기 전에는 '나 같이 이름없는 목동을 하나님께서 크게 보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삼하5:12)는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찬송하며 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흥분을 느끼며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자 구원의 기쁨이 마음 속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음이 지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주세요. 그러면 내가 모든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죄인들이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 전하는 말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 좋긴 굉장히 좋은가 보다. 믿기만 하면 대단한가 보다.' 하는 어떤 감동까지도 전달되게 됩니다. 결국 안 믿던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2. 그리고 당당하십시오.

5:1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합니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구원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면 여기 누리자라는 말은 enjoy하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누린다라는 표현은 특권입니다. 특권은 누가 누릴까요?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특권이 있는데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특권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청년 집회에도 오셨던 부산복음병원에서 외과 의사이자 교수인 이병욱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까지 암 수술만 3000회 이상을 하면서 재발율이 아주 낮다고 평가를 얻을 만큼 권위있는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외과 의사라는 데 평소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외과는 의학도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과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피를 봐야 하고, 자칫 수술도중 실수할 수 있는 위험부담이 따르며, 게다가 응급환자가 발생시 밤낮없이 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소위 말하는 3D업종인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돈을 벌어 남보다 큰 집에서 살거나, 외제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남에게 과시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소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명자의 삶을 사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이렇듯 자기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졌습니다. 원래는 3D업종이라고 생각한 그 일이 NEW 3D업종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3D업종이 되었습니다. 자기 직업이야말로 '드림'(Dream)이 있고, '다이나믹'(Dynamic)하며, '드라마틱'(Dramatic)하다고 정의 내렸습니다. 곧 꿈이 있는 직업이요, 아주 역동적인 직업이요, 죽었던 사람을 수술해서 살리는 극적인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니 삶이 즐겁고,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성공적인 삶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틈만 나면 전도하는 전도에 미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까? 우리는 절대로 실패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떻게 인생을 살다가 가든지 우리는 절대로 실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감격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뜨거움이 치밀어 오르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감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영원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사죄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성공의 주인공입니다. 이 좋은 것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어선 안 됩니다. 내가 만난 이 예수를 전하고 삶에 기쁨을 가지고 사십시오. 결코 십자가의 그 은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흘러 떠내려가게 합니다. 저 골짜기로! 구원받은 은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즉시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질병으로부터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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