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6년도 절반의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아마 여기모인 성도 여러분 가운데 맥추절이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 산 위로 부르신 후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규례에 대해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3대 명절을 말씀하십니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드리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일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모든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감사드리는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유월절과 수장절 사이에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하십니다..(출23:16) 맥추절은 유월절이 지난 후 7주간 지난 후에 드린다고 해서 칠칠절 혹은 오십일 째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맥추절은 밀과 보리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함으로 드리는 절기입니다.ㅠ따라서 하나님께서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미래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파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게 될 것임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거칠고 황량한 광야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미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내 손에 아무 것이 없어도, 앞으로 받을 하나님의 복을 미리 바라보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 맥추절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그러면 맥추절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의미를 지닌 절기입니다. 애굽에서의 430년 동안의 노예생활과 광야 40년 동안의 고난의 세월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참한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주시고, 힘들고 고통스런 광야생활 동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가나안의 풍족함에 빠져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불행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 3절기를 제대로 지킨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찮다는 이유로 절기가 있다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백 년을 보낸 암흑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적절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를 밟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체질화되고 습관화 되도록 계속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7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향 땅에 돌아올 때에 지었던 찬송시입니다. 그들은 70년 동안이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70년의 기한이 끝나자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기들이 꿈에 그리던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기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당신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보면 3가지 감사를 합니다.
1.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입니다(1-3절).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인은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해와 달과 별도 아니고 선조나 조상이나 어떤 피조물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여호와”가 3번 나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란 뜻입니다. 바로 그분은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시인으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그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이 바로 ‘속량’입니다. 여기 속량이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속량하사’란 말은 “구속”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옛날 번역에는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속량”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게울레”인데 “대적의 손에서 그의 백성들을 빼내시기 위해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의 대가가 치루어 진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갈3: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강해를 하면서 ‘즐거운 교환’ 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루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신음하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의지로 죄의 옷을 입으시므로 ‘즐거운 교환’을 하셨다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을 안겨줍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저주에서 용서로, 가난에서 부요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고전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백합니다. 지금 시편기자도 이 감격을 가지고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하고 죄 값으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옛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 때문에 심판을 받거나 멸망당하지 않게 됐습니다. 바로 이것이 속량을 받은 새사람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속량을 받은 새사람은 구원 받은 감사를 우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이것보다 우선되는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감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감사하겠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70년 동안이나 포로생활을 한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강대국 바벨론의 포로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건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4-7절).
여기 4-5절에 보시면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주할 수 있는 곳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오히려 40년 동안 방황의 세월이었습니다. 여기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그것은 방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아픔이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그 광야의 터널을 벗어 나려해도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여러분은 목마름이 없나요? 한 해의 절만을 왔는데 아직도 방황하며 피곤하지는 안으십니까? 지금도 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칩니까? 성공에 목말라 하고, 출세에 목마른 사람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재물을 얻을 수 있고,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머지고 과연 목마름이 해결 되었나요? 여러분도 아시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가수요, 락큰롤의 황제였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의 음반만 6억장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웠습니다. 수십 억이 그의 노래와 연기에 환호했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결국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리던 프레슬리는 1977년에 진통제만 5,300 알을 먹다가 4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마릴린 몬로는 어땠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또 어땠습니까?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여기 ‘근심 중에’란 말은 다른 말로는 “재난 중에”란 말입니다. 결국 시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6절의 고백처럼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다만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 목마르고 주리고 적의 위협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니 들으시고 응답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진퇴양난의 홍해 바다 앞에서 울부짖었고, 물이 없는 광야에서 부르짖었으며 배고프고 목마를 때마다 다른 길이 없어 오직 하늘을 바라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보내 주셔서 먹여 주셨습니 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어갈 때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오 살려 주셨습니다. 적이 침입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 살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니 응답하시고 적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로 뱀이 나와 물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응답하시고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광야의 환경이 말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광양 40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기도만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기에서 '바른 길'의 '바른'이란 원어는 '야솨르'라는 말로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꾸불꾸불하지 않고 '곧은'이라는 의미와 '가장 알맞는', '가장 적합한'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가장 적합한 길, 가장 합당한 길로 이끄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바로 그 40년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셨고, 힘들고 어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은 도우셨고 구원하셨습니다.
3. 영혼의 만족과 채워주시는 은혜를 감사했습니다.(9절).
본문 9절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에 만족을 주십니다. “사모하는 영혼을” 히브리어로 “네피쉬 쇼케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주의 구원을 갈망하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심령”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만족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42: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물을 찾지 못한 사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합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사슴의 눈에는 물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느긋함이 없습니다. 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남녀 사이에는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서로를 깊이 갈망하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금방 데이트를 마치고 와도 금방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그것을 누가 임의로 떼어놓는다면 심각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갈급함이 있는 심령을 하나님은 만족하게 하시며 더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다시 9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에 만족을 주십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가 있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묘약 - 감사입니다. 묘약이란 말은 한마디로 신통하게 아주 잘 듣는 약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묘약은 은혜 받은 우리의 삶에 형통한 복을 말합니다. 그 형통한 복이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감사는 기적의 씨앗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광야의 연단이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를 바라보고 나일강의 젖줄기를 바라보면서 애굽을 위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사람도, 샘물도 아무것도 없어요.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있었고 밤에는 극심한 추위가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광야 40년동안 하나님께서 끈질기게 요구하신 삶은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여전히 주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스타일은 바로 주만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광야지만 이 광야에는 숨겨진 축복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사막과 황무지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기막힌 비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비밀은 아무나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비밀을 알고 볼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광야에서 생수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의 비밀이 있고, 이들을 인도해서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인도하는 율법의 비밀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좌절하고 절망하는 인생들에게 성막의 비밀은 다시금 그들에게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또한 이 성막 위에 떠오를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이들을 보호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의 안내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생들에게 4절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40년 동안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말씀입니까?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걸었는데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이 광야의 축복이라구, 이 광야는 우리에게 절망 같으나 이 엄청난 은혜가 말씀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의뢰하고 내 인생을 주께 맡기며 그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깊숙이 체험한 사람은 결코 광야를 힘들어하거나 피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흡족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감사에는 현실을 초월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자꾸만 일이 꼬일 때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답답하고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아도, 그럴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정말 신기하게도 길이 열리게 됩니다. 감사는 막혀진 길을 뚫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풀려지지 않는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입니다. 영국의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목사님은 "감사는 산수에서 더하기(+)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집니다.
2016년도 맥추감사절을 맞은 우리 동성가족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모든 일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늘 감사함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 엄청난 감사의 비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와 더 나아가 다가올 미래에 우리의 영혼에 충만히 채워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감사의 삶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채워질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