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잡지사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위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답니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사람도 많았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오늘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 것조차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안에서 뛰는 것처럼 무엇엔가 쫓기듯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더듬이 잘린 개미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2016년도도 꼭 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정말 의미있고 보람이 있는 삶을 살아왔는가를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지금 자기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말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사용하던 말입니다. 하나는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이 골인 지점을 향해서 전력질주 할 때 쓰던 표현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며 사냥할 때 쓰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달리기 선수가 골인 점을 향해서 한 눈 팔지 않고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목표를 정해 놓고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목적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자기의 인생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원래 바울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던 사람입니다. 야심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일찍이 고향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최고의 랍비가 돼서 한 시대를 풍미할 야심 찬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스펙을 가진 자입니다. 로마의 시민권 가졌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이에요. 바리새인이에요. 권력도 가졌고 지식도 가졌고 부유함도 가지고 좋은 것은 다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얻은 다음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주님 한 분을 내 가슴, 내 마음속에 모시면서 이 땅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삶의 이유를 알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일제의 핍박 속에 있을 때 우리 민족에게 용기를 주었던 인도의 타고르라는 시인을 잘 알 것입니다. 그는 당시 탁월한 글을 발표했던 이탈리아의 철학자 크로체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인 타고르가 강에서 배를 띄우고 크로체가 쓴 “아름다움에 관해”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책이 말하는 한 철학자의 눈에 보여진 아름다운 세계에 기뻐하며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촛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워낙 열중해서 읽다보니 촛불의 심지가 다 타 들어가 꺼진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문득 눈 앞이 캄캄해지고 책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이제까지 촛불에 가려졌던 세계가 그의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주변이 눈에 익으면서 흐르는 물이 보이고, 달빛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다가옵니다. 타고르는 고백합니다. “나는 그때까지 촛불에 의지해서 크로체의 아름다움을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꺼지자 하나님이 빚으신 저 아름다움이 나에게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창공에 떠있는 별과 달의 아름다움,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물결에 굽이치는 달빛, 온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나는 촛불이 꺼진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때 내 것으로 차 있었고, 내 노력, 내 의지로 가득차 있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었던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내 운명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주님 앞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쏟았던 모든 것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들이 각각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 갑자기 영롱하고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들어오자, 이제까지 광채를 빛내던 모든 보석이 빛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변함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삶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기쁨. 뜨거운 감격, 가슴 깊은 곳에 저미도록 스며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넘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사합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감사합니다.
감옥에서 저미어오는 매맞음의 통증을 끌어안으면서도 감사합니다.
살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며 감사합니다.
그는 신약 13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이 전천후의 감사는 바울의 삶을 능력 있는 삶으로!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면 그의 인생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저는 이제 전반기를 마치고 남은 후반기를 살아갈 때,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첫째,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 겸손한 고백입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를 처음 믿은 이후로 그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또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세계 역사가 되도록 자리 매김 하는데 있어서 영웅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고, 또 서구 문화를 놓고 볼 때 문명의 물꼬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는 이상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해야 될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실 이 세상에 기독교 크리스천으로는 최고의 신앙의 사람입니다. 누가 바울같이 경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누가 바울같이 의로울 수 있습니까? 바울은 율법에 요만큼도 틀린 일이 없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울같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바울같이 희생하고 선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바울 같은 지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되고 만족해서 이제 좀 템포를 늦추고 적당히 살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좀 천천히 가자. 여유를 갖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는 주께 부름받은 현장에서 정말 겸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빌 2:12절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비행기를 탈 때 짐의 무게를 잽니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짐을 가지고 가면 비행기가 뜰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에게 필요하지만, 자세히 보면 인생에 짐이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너무 과하게 부담이 되는 집을 융자를 얻어 샀다면 그다음부터는 삶의 여유가 없습니다. 집에 매여서 몸이 아파도 융자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드러누울 수 없습니다.
LA에는 홈리스들이 많습니다. 한번은 시내를 지나가는데 한 홈리스가 카트에 짐을 가득 싣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카트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잔뜩 실은 두 개의 카트를 어떻게 끌고 다닐 것입니까?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불필요한 짐들이 너무 무거우면 순종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도록 무거운 짐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꽃잎은 조그만 물방울이라도 금방 떨어뜨려 자신을 가볍게 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뼛속까지 비워 자신을 가볍게 합니다. 우리는 자주, 정기적으로 나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을 과감하게 떨쳐내야 합니다. 내 몸도 가누기 힘들면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내 삶에 집착하고 그 안에 매여 산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적인 삶을 어떻게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가장 잘 믿는 길이 뭐냐?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부족한 자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대한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항상 빈 마음으로 서야 되고 부족함과 아쉬움으로 서야 합니다.
둘째,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외상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강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늘 나의 삶에서 나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큰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 오는 날에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비가 오면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비가 오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끔찍했던 사고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한 사람은 생각이 부정적이고 어둡습니다. 어두운 생각의 습관이 자신을 꽁꽁 묶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듯 하다가 뒤로 물러나고, 제자리를 맴돕니다. 사실은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이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태도의 영향을 받습니다.
만약 바울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혔다면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핍박자요, 훼방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과거 삶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았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감기와 같습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실패를 딛고 일어서느냐’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뒤에 있는 것은 잊으라’고 말합니다. 부끄러운 과거, 실패한 과거를 잊을 것을 권면합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용서받을 수는 있습니다. 용서는 잘못된 과거에서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전에 나의 삶이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과거의 실수와 허물 때문에 매여 있다면 이 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유해지시기를 축복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9:62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뒤에 있는 것은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잘못했던 것도 잊어버리십시다. 실수했던 것, 부끄러운 기억, 수치스러운 과거 등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잊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어두운 과거를 이 시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앞의 것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여기 소개 되는 빌립보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을 하지 않았나 추측을 합니다. 여러분, 바울의 형편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지금 수감되어 있습니다. 갇혀 있습니다. 언제 풀려 나올 지도 모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그는 이미 불길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나이도 지금 60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몸에는 여전히 괴롭히는 가시가 있습니다.
남에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늘 어떤 통증을 달고 살고, 불편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육상선수가 마지막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가듯이 인생을 살겠다,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가볍게 들으면 안 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 포기하고 그저 앉아 있을 만도 한 처지인데 끝까지 달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달리리라.' 하는 그 바울을 우리 마음에 한번 그려 봅시다. 그래서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기가 개척한 교회 성도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썼습니다.
요사이처럼 볼펜이 있습니까? 종이가 제대로 있습니까? 그 어두 침침한 감옥 속에서 시력도 좋지 않아 고생을 하는 마당에 글을 썼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리고는 시간만 나면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성도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가며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대인들을 앉혀 놓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감옥에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달려가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걸어가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달려가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푯대를 향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내가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작은 예수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목표와 이상이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적당히 걸어갈 그런 일이 아닙니다. 적당히 기어가면서 할 일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야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10절, 11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나니'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예수처럼 욕먹고 예수처럼 매 맞고 예수처럼 굶주리고 예수처럼 멸시 받고 하는 일을 자청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자기도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능력을 자기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 주님을 존귀케 하기를 원했던 것이 바울이 자기의 인생 목표로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빌1:20절로 가 보십시오. 바울의 기대, 바울의 목표,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다시 한번,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 이것만이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이 일을 향해 그가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 찬송을 부르면 바울의 그 심정을 우리가 알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생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있는지 우리 모두 한번 자신에게 물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에게 붙잡힌 자,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존귀케 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소박한 꿈, 즉 '이것을 놓고 나는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목표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금년을 우리가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 왔습니까? 지금 절반을 살아오셨는데 흔들림이 없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보면 답답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서 있는 땅이 늪처럼 느껴질 때 말입니다. 다시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우리로 낙심케 하고 두렵게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있기에 사망 권세의 위협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신뢰하며 새 생명을 향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푯대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도 남은 새 힘을 날마다 주십니다.
사람들이 볼 때 나의 현실이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내 평생에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떠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크신가요? 그 문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면 되잖아요? 인생의 그 어떤 문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큰 줄로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 인생의 그 어떤 결정적 실수나 실패도 극복하고 회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