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부터 한 주간 동안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하십니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창립 47주년을 준비하면서 엘리야를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펴 본대로 엘리야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실패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 회복되는, 그래서 마침내 승리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누구나 쉽게 약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희미해집니다. 심지어 종잡을 수 없이 방황하다가 어느새 인생의 위기가 신앙의 위기로 다가섭니다. 엘리야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3년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던 메마른 땅에 큰비를 쏟게하는 사역도 했습니다. 하늘의 불을 땅에 쏟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엘리야도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는 협박 앞에 저 남단 브엘세바까지 도망하면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청하는 모습은 어쩌면 당당한 모습이 저렇게 초라해 질수도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영적 위기 역시 견디어 냅니다. 그렇습니다. 그를 만나면 실패는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그를 만나면 말씀이 능력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면 나도 비전을 성취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그 엘리야가 역사의 무대를 뒤로하는 시간을 우리는 대하게 됩니다. 이제 그가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보여준 그의 삶은 오늘 우리 교회가 창립 47주년을 맞이하면서 배워야 할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는 다시한번 교회가 가져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그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에 사역을 정리하기 위해 사명자를 세웁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한때 장면 총리를 저격하고 사형 언도를 받은 분이 목사가 되어 28년 간 한 교회를 사역하고 정년이 되어 은퇴하실 때 자신 안에서 겪었던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이화수, 유지광, 이정재, 조봉암 같은 사람들과 같은 감옥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출소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 개척을 하다가 난지도에서 빈민들과 함께 사역하는 가운데 정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하던 사역을 놓게 된다고 생각하니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외동딸이 아버지 옆으로 조심스럽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두었다고 합니다. “아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무대에 있을 때보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야!” 그러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인생을 한 길에만 쏟은 사람들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겪어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엘리야의 시대가 마감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엘리야라 할찌라도 물러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움은 다음 세대를 감당할 후계자를 세운데 있습니다. 엘리사를 세운 것입니다.
엘리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보통사람이었습니다. 족보가 화려한 것이 아니고, 학력이 찬란한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생겨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배경, 족보, 상황을 초월하여 인물을 쓰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비범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엘리사 그가 엘리야를 처음 만났을 때 농부의 한 사람으로 12마리 소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키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어두운 시대를 밝히기 위해 나를 따라 나서지 않겠느냐는 부름 앞에 주저없이 따라나섭니다. 그는 쟁기를 쪼개 장작 삼고, 밭 갈던 소를 잡아서 동리사람들을 대접하고 부모님께 큰절하고 스승을 따라 나섭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훈련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이어질 미래가 희망적입니다. 제대로 된 인격과 신앙을 갖춘 사람이 만들어져야 교회의 미래가 열리기 시작을 합니다. 환경이 최우선의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람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지금 본문에는 여러 지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길갈이라든지, 벧엘, 그리고 여리고 요단등의 지명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이 지역을 다닌 것은 이곳에 선지학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어지러운 시대에 다음세대들에게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따라 나섭니다. 여기에 대해 엘리야는 계속 여기 남아있으라고 외칩니다.
2절에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했고, 4절에도 보면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했으며, 6절에도 보면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했다고 반복해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며 엘리야가 가는 길을 따라 나섭니다.
왜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스승의 길을 따라 나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서 드러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여기 보세요. 엘리사가 뭐라고 엘리야에게 말합니까?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 예전 성경엔 ‘갑절의 영감’이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자신이 사역할 시대는 엘리야가 사역했던 시대보다 더 악하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는 머리 잘린 삼손처럼 외형은 멀쩡한 것 같아도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이 뜨거운 열정이 사라지고 주전자 속의 개구리처럼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채 세상이 던져 준 세상적인 물질과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영적으로도 사탄이 그저 제철을 만난 듯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오늘날 시대는 누가 뭐라 그래도 냉담한 시대입니다. 오늘도 싸늘한 침묵 가운데 드려지는 대부분의 냉담한 예배를 보십시오. 그 열정이 사라진 모습은 바로 교회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죽은 자들이 누워 있는 묘지에 깃드는 적막 같은 침묵입니다. 그 침묵은 경건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시체와 같은 침묵과 냉담한 무관심 속에서 예배를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교회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을까요?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걸음 속에서, 에스겔 골짜기에 울려 퍼지던 생기를 힘입은 군대의 행진을 읽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사라지는 수많은 교인들의 등을 보면서 설교자들은, 아무런 영적 감화도 없이 마치 패잔병처럼 세상을 향해 걸어나가는 그들을 통해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영적 상황에 획기적인 변화 없이도 예배 순서나 고치고 프로그램이나 자꾸 개발하면, 지금처럼 영적인 삶에서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가는 시대가 오리라고 전망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성도, 성령의 불이 소멸된 교회는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죽은 물고기를 보세요. 아무리 커도 물결 따라 흘러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작아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린 삶은 죽은 물고기와 같습니다. 상황 따라, 환경 따라 흔들리는 갈대처럼 춤을 춥니다. 삶의 방향과 초점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당시 제자들을 보세요.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120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남자,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병이 나은 경험이 있거나,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로서 대부분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명함도 못 내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상대해야 할 세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정말 난폭하고 영적으로 어두움이 깔린 그런 절망의 환경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도무지 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명령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난제를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 같은 별 수 없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key가 성령입니다. 이악한 세상을 다룰 수 있는 열쇠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성령이 key입니다.
오늘 우리 동성교회도 이 갑절의 영감 -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필요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도 당시 성도들에게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롬12: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 “열심을 품고”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제오”인데, 이 말은 “성령”이라는 뜻의 “프뉴마”와 “물이 끓듯 열정적이다”는 뜻의 “제오”가 합쳐진 말로 “성령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agloy with the spirit" 성령으로 불타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심”이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기도생활도, 교회봉사도, 성령의 뜨거운 임재를 경험하고 체험하고, 열정적으로 충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 갑절의 영감을 구할 때, 10절을 보면 엘리야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영안이 열려서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이 끝날 때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 그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과 함께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에 있던 제자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안이 열린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 움을 받게 됐던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영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사역 가운데 여러 차례 확인될 수 있습니다. 왕하 6장을 보면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습니다. 먼저 엘리사를 죽이려고 엘리사가 머물던 도단 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도단성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너무 두려워서 엘리사에게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기도가 응답되어 사환이 불말과 불병거 즉 하나님의 군대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에워싼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영안이 열려있던 사람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비전은 미래를 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잠29:18의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세요. 비전도 없이 그냥 교회에 출석하는 그런 교인들이 무슨 역사를 일으키고 세상 앞에 당당해 질 수 있나요?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비전을 위해 어떤 값을 치루고 있습니까?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던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이 없이, 비전이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수백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바라보면서 예언한 내용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병들고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갇힌 자가 놓임을 받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이 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요, 이 비전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다 가지고 있어야 되고 분명히 이 비전을 먹고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비전은 너무나 황홀한 꿈이기에 이 비전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주님 앞에 나실인처럼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전때문에 숨을 쉽니다. 우리는 이 비전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 비전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비전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비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야망이나 세상적인 것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대로 그들은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를 거부했습니다. 두벌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생을 선택하고 그 가난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비전은 황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비전에 매료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동성 교회에게 주신 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비전 앞에 붙들린 사람만이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노력했는데 안됐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그러나 이 일을 위해 우리가 구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다시 한번 우리 교회가 소망해야 할 것은 엘리야가 불꽃처럼 살다가 불기둥이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져야 합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