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공감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은 연약함이 있는가하면, 내가 본받아야할 좋은 면들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엘리야는 자신이 살던 어두운 시대를 하나님의 영광의 횃불로 밝혔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의 불을 끌어내리기도 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땅에 비를 내리게 한 기적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한 없이 약한 사람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 어쩌면 우리와 너무 친숙해 질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 엘리야를 생각하면서 그가 단지 하늘의 불을 끌어내렸던 사람이라고 해서, 비를 멈추고 내리고 한 기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엘리야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쩌면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모습 속에서 회색 신앙으로 물들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된 신앙을 일깨워 주었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 땅에 보여 줍니다. 이제 창립 47년을 맞는 우리에게 이 엘리야 한 사람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특새를 하면서 엘리야를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제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를 통해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Ⅰ. 그는 철저히 훈련과 연단으로 다져진 사람입니다.
본분 1절에 보면 엘리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기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 - 이말은 요단강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개발이 덜 된 시골 마을 길르앗이라는 촌락지역에 디셉 출신인 엘리야. 한마디로 촌사람이란 이야기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우거라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셋방살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 조그마한 시골에서도 자기가 살 방한칸도 마련치 못하는 참 답답한 사람 아닙니까? 그는 모세처럼 왕궁에서 훈련을 받은 인물이 아니었고 바울처럼 학문적인 수련도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발탁된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예비하셨고, 그를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방법으로 등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인물을 생각하지 못하는 때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또 예비하시고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당신의 역사를 위해 일하는 일꾼으로 준비하십니다. 그 디셉사람 엘리야가 처음 등장해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기 아합이란 인물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입니다. 당시 왕이라고 하면 무서운 권력자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아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아합 뒤에는 이세벨이라고 하는 무서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왕상 18:4절에 의하면, 왕비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수도 없이 죽였습니다. 마치 파리를 때려잡은 것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무서운 여인입니다.
이런 사악한 아합왕과 이세벨 앞에 무명 선지자인 엘리야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하고 당찬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것인데, 여기서 우로는 비와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수년 동안 내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이 땅에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비가 잘 내리는 지역에서는 이 말이 실감나질 않지만, 팔레스타인과 같이 황막한 광야에서 3년간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쇼킹한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그는 아합에게 나아갑니다. 문무백관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가서 큰소리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이는 이 땅에 비나 이슬이나 한 방울도 내리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의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지금 어느 자리라고 이런 이야기를 겁 없이 합니까? 이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이런 외침을 할 수 있나요? 그것은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를 향한 의로운 한 선지자의 힘찬 외침이었고 절망적인 사회를 향해서 유일하게 희망의 빛을 안겨주는 멋진 한사람의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멋진 출발을 했던 엘리야가 그 다음의 본문을 보면 이제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3년 동안을 몰래 숨어서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큰소리 한번 뻥치고 도망해 버린 민망한 몰골을 보여줍니다. 꼭 돈키호테 같은 행동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가 숨은 곳은 ‘그릿 시냇가’라는 곳입니다. ‘그릿’ 이라는 이름의 뜻은 ‘단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부세계와 완전히 끊어진 채 아무도 없는 그 작고 고독한 광야의 흐르는 한 시냇가에서 그것도 3년이라는 시간동안 지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 그릿 시냇가로 오게 해서 그것도 3년씩이나 머물게 하셨나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릿 시냇가라는 현장은 하나님의 연단의 훈련장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연단의 장소였습니다.
마치 요셉이 애굽이라는 고난의 훈련장에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모세가 미디안 광야라는 고독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처럼,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새롭게 출현할 때까지 사울을 피해 온 이스라엘 전역을 도망다니면서 통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군림할 준비와 훈련을 했던 것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등장하기 위해서 훈련의 과정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엘리야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교회의 지체로 부르신 그 부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강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년도에 “자라나는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신앙으로 열매 맺는 신앙으로”라는 표어로 시작을 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구원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그 사명을 위해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만들어지는 열정과 헌신이 일어나는 그런 사람들이 세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답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대로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작고 초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권세 있고 학식을 갖춘 사람을 뽑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세계를 복음으로 변화시키실 큰 꿈을 갖고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2. 이 그릿 시냇가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현장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왜 하필 이 시냇가로 인도하셨을까요? 시냇가가 아니라 큰 강물로 인도하셨으면 물도 덜 마르고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릿 시냇가는 일종의 조그만 실개천입니다. 요단강의 지류이지요. 워낙 작아서 지금은 어디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시냇물을 마시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도록 하는 믿음의 훈련이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까마귀가 엘리야의 말을 알아듣고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시간을 맞춰 떡과 고기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까마귀가 물어다 준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처음에는 엘리야도 늘 마음 졸여야 했을 것입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저녁 먹을 것이 걱정됩니다. ‘정말 저녁에도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다줄까?’ 하고 말입니다. 더구나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던 시대에 까마귀가 어디에서 떡을 구해오며 고기를 구해올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시간에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야는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그가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적당히가 아닙니다. 온전히, 100%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전적으로' 라는 뜻으로 '목숨을 다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바라보고 사느냐, 무엇을 쳐다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비리보고 사는 자는 미래에 올 꿈과 소망으로 기쁨을 누릴 것이요 과거만을 바라보는 자는 과거에 얽매이게 됩니다.
3.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신 길로 이끌어 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7절을 보세요. 그런데 7절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 시냇물을 마셨는데, '가뭄이 오래 계속되자 얼마 후에는 그 시냇물까지도 말라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지금까지 훈련을 받은 것은 까마귀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시냇물을 마시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냇물이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시냇물이 말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버리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시냇물이 말랐다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고 우리를 버리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시냇물이 마르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 이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냇물을 마실 때에는 참 좋았는데, 왜 이제는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3년 동안이나 가뭄이 계속된 때이기 때문에 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물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9절입니다.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내가 네 생명을 위한 다른 계획을 마련해 놓았노라"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릿 시냇가 훈련소에서 3년 동안 훈련을 받은 엘리야를 드디어 세상으로 파송하시는데, 마실 물 없는 모습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한 과부를 통해서라도 너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택한 자를 결코 놓치지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독생자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 그릿 시냇가의 머무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바쁜 일상 속에서 나도 모르게 주님과의 첫사랑의 열정이 식어지진 않았습니까? 그리고 오늘 여러분의 신앙이 너무 타성에 젖지는 않았나요? 아무 감격이 없이 종교적 활동을 반복합니다. 오랫동안 출석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이 드려왔던 예배며 찬양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없이 신앙 생활을 합니다. 이젠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사라지고 의식 없이 찬송 부르며 가사의 의미도 모릅니다. 기도드릴 때도 그냥 눈 감고 있다가 눈뜹니다. 이는 빨리 영적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그냥 나두면 자기 영혼을 마비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조차 분별할 수 없는 상태로 나갑니다.
그릿 시냇가는 치료의 현장이요 회복의 현장입니다. 3년의 그 긴 시간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기막힌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 그릿 시냇가의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갈멜산 위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불러놓고 대결할 때에도 확신에 찬 모습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당신의 살아 계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힘들고 낙심될 때 다시 일어설 용기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믿음을 통해서 희망을 보는 자가 그 용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불가능한 상황도 가능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을 내 눈으로만 보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10살짜리 미국의 한 흑인아이가 길을 가다가 풍선장수가 풍선에 수소 가스를 넣어서 고무줄로 묶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붉은 색, 보라색, 파란 색, 온갖 아름다운 풍선을 아이들에게 팔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 흑인 소년이 풍선장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아저씨, 검은색 풍선도 하늘을 날 수가 있나요?” 피부가 검다는 것 때문에 아이들에게 늘 놀림을 받고 소외를 당하던 것이 마음에 한이 되었던지 “검은색 풍선도 하늘을 날을 수 있나요?”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그 때 풍선장수가 그 어린 흑인 소년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그럼, 검은색 풍선도 하늘을 날 수 있고 말고. 이 풍선 속에 가스만 집어넣으면 그 가스 때문에 어떤 색 풍선이든지 다 하늘을 날 수 있단다.” 그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그 흑인 소년의 온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렇구나. 비록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지만,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바로 그 흑인 소년이 제시 잭슨 목사님입니다. 지금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인권운동,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서로 일하다가, 킹 목사가 암살당한 이후 킹 목사의 후계자로서 미국 내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 대표적인 흑인인권운동가이기도 하고,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평화적으로 중재를 이끌어낸 미국의 대표적인 평화주의자이기도 합니다.
풍선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것은 풍선의 색깔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 수소 가스가 들어가면 어떤 색의 풍선이든지 다 하늘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환경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 하나님께서 능하고 강하신 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 속에 박제된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몇몇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만 함께 하셨던 하나님도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현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도 함께 하십니다. 나를 위해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47년 된 우리 교회가 정작 필요한 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일상에 잠시 하프타임을 거시고 그릿 시냇가로 모입시다. 미처 알지 못했던 하늘의 감추어 두신 만나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치료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나는 주님이 서 계신 곳까지 가기 위해서 얼마나 성장합니까?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합니까? 우리에게 ‘그릿 시냇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기 머무십시오. 나도 모르게 타성에 찌듯 것들을 다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 앞에 나의 사명이 살아나고 다시 한 번 뜨거운 헌신과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이 일어나냐 하지 않습니까? 이 은혜가 가득 일어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