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LA에 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것이 한인 상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한 복판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웬만큼 성공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폭동으로 값비싼 물건들이 모두 타 버리고 약탈 당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안됐다. 이 집 주인은 정말 열심히 노력하던 사람이었는데... ”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가게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었습니다. “ 이 상점의 모든 것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새롭게 출발하겠습니다. 주인 백.” 거리를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주인의 용기와 끈기가 당당함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이 정도의 기백과 끈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금방 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십시일반으로 그 주인을 도왔습니다. 돈도 꾸어주고 물건도 외상으로 대주고 해서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다시 일어섰습니다.
가게가 몽땅 불타 버린 후에 남들처럼 금방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바닥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실로 위대한 일입니다. 타고 남은 잿더미 위에서 모두 정말하고 있을 때 거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로 위대한 사람일 것입니다. 처칠이나 링컨 같은 사람만이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꺽일 듯 꺽일 듯 하면서도 꺽이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 같으면 절망하고 포기했을 그런 환경 속에서 끗끗이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도 똑같습니다. 모두 다 어렵습니다.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사람은 희망의 길을 찾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어두움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두움 밖에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능성을 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해 보이지만 불가능한 것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침!! 우리 자신을 향해 물어봅시다. “나는 어떤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눈을 가지고 나 자신을 보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눈을 가지고 사랑하는 자녀들과 아내와 남편과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각이 곧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눈에 보이는 절망적인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을 뛰어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메이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장애물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영적 거인들인 청년의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령으로는 18세부터 35세인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연령만으로는 청년을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이 연령대 사람들이 지닌 특징이 있습니다. 청년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지치지 않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청년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미래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년을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갑갑하게 막힌 절망스러운 현실을 밝게 열어갈 가능성 즉 시간과 열정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우리 중에 연령으로 봤을 때는 청년인데 그 속에 든 것은 세상의 썩어지고 병든 것이 가득 하여, 자신의 야망과 꿈 이룰 생각만 하는 청년답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나이는 많지만 하나님 주신 꿈을 간직하고 공동체와 민족의 미래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열정적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청년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의 놀라운 역전을 이룬 한 주인공을 만납니다. 본문의 그의 가장 황금 같은 시기 17세에서 30세를 다룬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예의 신분에서 애굽의 총리까지 오르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본받아야 할 중요한 신앙의 모델이요, 인생 모델이요, 인생역전의 성공 모델입니다. 요셉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을 함께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현재 자신의 삶 가운데 더욱 충실하고 성실하게 전념하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충격적인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삶의 태도를 갖기도 합니다. 헛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은 자기가 행했던 모든 일들을 부정하게 되며 그것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합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들을 다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을 떠나고 싶은 유혹 까지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통스런 마음을 이겨나가며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더욱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는 외국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지금까지 채색옷을 입고 귀하게 여김을 받으며 자란 요셉이 노예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언어가 다릅니다.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며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자리도 아닙니다. 처음 노예로 갔을 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까 단순노동을 시킵니다. 다른 노예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인 자기가 해야 할 현재의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해서 죄수로서 자기가 해야 할일을 찾아서 더욱 열심히 주어진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삶을 과거와 비교하며 원망과 술과 노름과 방탕함으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원망하고 타락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요셉은 자기 일에 더욱 몰두했습니다. 요셉이 훗날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제외하고 요셉에게서 찾으라고 한다면 바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열심이 미래를 열어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롭게 도전받아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제한 된 환경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앞에 전개되는 현실을 한탄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찾아서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의욕 없이 멍청이 왔다가 멍청히 가는 그런 인생에서 다시 일어서십시오. 젊은이들 속에 볼 수 있는 빛나는 눈동자와 그리고 다시금 미래를 추구하는 열정으로 여러분의 눈빛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에게 있어서 아주 독특한 표현이 있는데 4절에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여기 ‘섬기다’는 말은 종이 주인을 섬긴다고 할 때도 쓰는 표현이지만, 동시에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종이 주인을 섬기는 모습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이 주인 보디발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랬기에 주인 보디발이 그 섬김에 감동을 받고 그를 가정 총무로 삼은 것입니다.
2. 이 요셉이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임마누엘 신앙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9장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3절에도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21절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23절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요셉이 형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위대한 꿈을 꾸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남보다 탁월한 지혜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잡초와 같은 인생입니다. 인신매매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별 볼일 없는 변방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과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간섭하시고, 그의 꿈까지도 지켜주십니다. 요셉은 잡초 같은 인생위에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여러분, 보디발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바로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며 바로를 호위해 주는 사람이 보디발입니다. 당시 바로 왕은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태양신의 최고 제사장으로서 바로는 자주 태양신 앞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은 바로가 태양신 앞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 늘 그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보디발 역시 태양신을 열렬히 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보디발이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39:3) 심지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 고대 애굽의 법으로 하자면 즉시 사형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요셉을 사형시키지 않고 감옥에 그냥 가둬 둔 것으로 보아 보디발은 요셉이 어떤 인물이며 자기 아내가 어떤 여자인 줄 알았기에 노예를 살려 감옥에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면 보디발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요셉을 죽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요셉의 평소의 삶의 성실함과 더 나아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디발도 보았던 것입니다.
3. 요셉은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갔지만 특별한 감옥에 갑니다. 그곳은 폭력배나 소인배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왕과 관련된 일로 잘못을 저질러 잡혀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당시에 애굽의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감옥입니다. 시105:18절에 보면 “그 발이 차꼬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감옥에서의 그의 환경입니다. 꼼짝달싹도 못한 채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악명 높은 애굽 왕 바로의 지하 감옥에서 짐승보다 못한 생활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 애굽의 최고의 권력자였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치하던 사람이 감옥에 왔을 때 하는 불평이 무엇과 관련되었겠습니까? 정치와 관련된 일입니다. 경제와 관련된 일입니다. 군사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리고 사회와 문화와 관련된 일입니다. 왕실 인간관계에 관한 일입니다. 실패한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고 성공한 이야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와 주변국에 대한 이야기가 때로는 불평 때로는 자랑과 섞여 나옵니다. 남의 상처와 아픔을 듣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요셉은 들어주면서 봉사하고 섬긴다 생각했는데, 좀 다르게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그 관리들을 통해서 앞으로 총리대신이 되기 위한 특별과외수업을 받는 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돈 한푼들이지 않고 감옥 대학에서 2년을 배운 그것은 그의 생애를 송두리 채 바꾸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는 이미 나라정세를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나라 정책 중에 무엇이 문제였는가도 알고 있었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를 파악하고, 어떤 인물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준비된 총리였던 것입니다. 이 요셉은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주변이 복을 받습니다. 보디발이 복을 받았고, 자신의 가정도 흉년 때, 애굽으로 이주해서 고센이라는 축복의 땅에 가족들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흉년이 들어 도탄에 빠질 애굽을 건져 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49:22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축복이 자신의 경계선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담장을 넘어서 이웃에게로 뻗어나가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우리의 가슴이 가장 아프게 만드는 것은 ‘포기세대’라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세 가지를 포기하며 산다고 하여 ‘3포 세대’라 불리었습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5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3포의 연애와 결혼과 출산에다가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7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 그리고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에다가 꿈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꿈과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그래도 오늘을 이겨내며 살아갈 용기가 생겨납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홍정길 목사님으로부터 이랜드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하면서 재계를 굉장히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이랜드의 박승수 회장은 1975년 대학 4학년 때에 근육 무력증이라는 병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병은 근육의 마비가 서서히 몸 전체로 확산되어서 죽는 병입니다. 의학이 발달한 현재에도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자연히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독서를 하기 시작했는데 2년 동안 무려 3000권의 책을 읽었고, 이것은 박 회장의 눈을 뜨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오늘날 회사를 경영하는데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년 넘게 끌었던 질병은 하나님께서 그를 만지셔서 회복 되었습니다. 그는 2동안에 읽었던 3천 권의 책을 통해서 자신이 앞으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지, 내가 기업을 하면 어떤 기업을 할 것인지, 내가 하나님 안에서 살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익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게 주어진 그 좌절감과 절망감 고통과 아픔만 바라보지 않고 그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 되는 그 시점 바로 그 때 거기서 출발 하세요. 그때 주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요셉처럼 찾으시길 바랍니다. 단순한 일일지라도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사다리입니다. 그 사다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은 달라집니다. 사다리를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시작하셔서 주님의 뜻대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축복이 우리에게서 끝나지 않고 담장을 넘어 열방을 향해, 우리 후손들에게 이웃들에게 나누어지는 진정한 축복이기 위해서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주와 함께 날아오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