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는 스승의 주일로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도 그동안 수고한 교회학교 교사분들의 그 수고와 희생, 그리고 헌신을 어떻게 다 위로해 드려야 할지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 많습니다. 저는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참 안타까운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창 시절 때는 선생님은 거의 우상처럼 여겨지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 분들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 담겨져 내 삶의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그리고 지금도 그 스승을 만나서 사제간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교권이 무너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젠 스승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렇게 강단에서 스승에 대해 외쳐도 현실의 벽 앞에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요새 학교를 7판이라고 합니다. 1)교장 선생님은 죽을 판 2) 교감선생님은 살얼음판 3) 선생님은 이판사판 4) 학생들은 개판 5) 교실은 난장판 6) 장학관은 닭다리 판 7) 학부모는 전전긍긍 판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표현을 했는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요즈음처럼 교육의 현장이 살벌해 지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포기한 이판사판의 현실 속에서 이들을 감싸고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면서 상담해줄 참 선생님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3년을 동고동락하면서 이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지상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수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이 보여주신 그 모습은 여기 있던 제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주게 됩니다. 제자들이 이날 받은 스승의 가르침은 훗날 이들이 가야 할 삶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여러분이 다 잘 아시는 내용이 아닙니까? 이제 불과 몇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은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의 달려 죽는 그 고통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앞일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교회학교를 섬기거나 또 실로암 실버대학, 그리고 목장을 섬기는 목장지기 모든 교사들이 가슴에 담아야 할 말씀입니다.
Ⅰ. 여기서 스승으로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할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한 순간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랑에 대해 ‘로미오와 줄리엣’, ‘노트르담의 꼽추’, ‘태양의 후예’에서 보는 환상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한 순간의 열정은 영원한 사랑이 아닙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질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사랑은 감정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한 순간의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스스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34-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얼마 있지 않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하나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로운 계명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들어온 말입니다. 결코 새로운 계명이 아님에도 예수님은 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먼저 이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전혀 새 로운 사랑입니다. 이 요13장-17장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 가장 많이 표현하는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랑하라"는 말씀이 5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 44번이 이 예수님의 다락방 교실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어 하셨던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짜 사랑에 부딪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됩니다. 짝퉁 사랑, 병든 사랑, 함량 부족의 사랑으로 지친 영혼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늘 배고픈 허기진 마음에 안식이 찾아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녹아지는 경험이 일어나면 봉사하라 마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라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누가 나를 사랑하니 하지 않니 원망하고 시비하던 것도 다 사라집니다. 내 삶이 변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만나지 못한 것은 자동차로 친다면 시동이 안 걸린 것입니다. 자동차를 밀고 다닐 수는 있지만 오래 못 갑니다. 신앙생활도 이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처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사랑에 빠지면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연예편지 같고, 내 안의 미움도 내 힘으로는 없앨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슴에 밀려오면 그 미움, 증오, 짜증도 전부 사라집니다.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이 몹시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조차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는 기환이에게 담임 선생님은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고함을 쳤습니다. 집안 형편을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에게 교사는 다시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말합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친구들 앞에서 창피함을 당한 그는 이때부터 무엇이든지 필요할 때마다 도적질과 강도질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 후에는 살인강도 죄로 사형을 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사랑으로 품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마십시오. 끝까지 사랑으로 참고 기다려보십시오.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오. 반드시 변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사람을 세우는 스승은 단지 자기에게 보내진 영혼들에게 고급지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스승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한 영혼이라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스승은 대접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거기엔 희생과 상처와 아픔이 따르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스승의 자격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Ⅱ. 진정한 스승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스승이 어려운 것은 바로 말로가 아닌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저녁을 잡수신 후에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를 두르십니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삼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하나씩 씻겨주십니다. 발을 모두 씻겨주신 후에 다시 교육을 시킵니다. ‘왜 내가 선생으로서 너희들의 발을 씻겨 주었는지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행하라고 본을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13:13-15절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렇습니다. 그분의 실천은 '본'(example)이었습니다. 이 본의 극치는 ‘섬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막10: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언제나 남을 섬기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기쁨이 있고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섬길 때 주어집니다. 사람은 내게 소명으로 주어진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섬길 때 거기서 하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일을 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스스로에게는 행복을 만들고 이 세상에는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로버트 그린리프라는 사람이 쓴 ‘서번트 리더십’(종의 리더십)이란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동방으로 순례를 떠나는 순례객에게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던 레오라는 사람이 소개 됩니다. 그는 순례객들을 위해서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아했습니다. 그 레오가 그들에게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모든 여행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레오가 사라진 후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레오가 사라진 후에야 그들은 레오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레오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례객 중 한 사람이 몇 년 후에 레오를 찾아나셨습니다. 그 여행을 후원했던 교단을 찾아간 그는 자신들의 여행에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 그래서 심부름꾼으로만 알고 있었던 레오가 그 교단의 책임자였고, 정신적인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의 리더십을 말했던 그린리프는 이 레오야말로 전형적인 종의 리더쉽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교단의 책임자요 정신적인 리더인 레오가 순례객에게 뒷바라지나 허드렛일을 해준 심부름꾼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의 인격에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종처럼 섬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좀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그의 인격을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낮아졌기 때문에 더욱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Ⅲ. 저는 오늘 본문에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명의 삶을 이야기를 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 이 성만찬 이후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은 이 죽음이 모든 것에 끝이 아닌 당신의 부활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는 비전의 현장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다락방의 교실은 어떻게 보면 마지막 수업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은 제자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본을 보여 주십니다. 남들은 상대를 짓밟고서라도 성공하려는 데 몸부림을 치는데 오히려 섬김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수업에 제자들에게 비전을 심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당시 11명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 앞에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자들이 살던 당시의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 가슴 속에는 자신들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명자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16,17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말로만의 지식 전달이 아니라 친히 발을 씻기시는 삶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어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게 하는 교육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예수님을 본받아 발을 씻기는 선생이 되라고 명하셨으며, 그것은 굴욕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 복된 일임을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다시 모여 수업을 받습니다. 이 자리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숙제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까지 여기서 수업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은 이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 답게 당당하게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갑니다. 여기 예수님의 섬김을 받던 12제자들 가운데 11명의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닮는 섬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 속에서 거룩한 주의 향기를 온 땅에 펼쳐 보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거꾸러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의심쟁이 도마는 인도까지 복음 들고 갔습니다. 거기서 몸이 껍질 채 벗겨지는 고통 속에 순교합니다. 자신이 으뜸이 되고자 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까지 교회를 지키는 산 순교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며칠 전에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 성경을 출판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엠베서더 호텔에서 축하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자로 홍정길 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얼마 전에 유럽을 다녀왔답니다. 주일이 되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개신교 예배당을 찾는 데 교회당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년이면 종교 개혁 500주년닝 됩니다만, 지금 종교 개혁의 요람지인 유럽의 교회당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꺼질 줄 몰르던 부흥을 경험한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지난 번 통계에도 나왔지만, 천주교는 요 몇 년 사이에 200만의 신자가 늘었는데 그런데 새로 나온 그분들은 무종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 개신교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왜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개신교는 오로지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 가장 귀한 가치입니다. 그것보다 귀한 것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라는 것은 그 단어에 대응된 사고나 현장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앉아있는 의자라는 단어 그 의자가 없다면 그것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개신교는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없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염불로 주문으로 그 종교가 가능합니다. 그런가하면 엉덩이를 하늘에 쳐들고 메카를 향해서 하루에 다섯 번 인사하면 그것이 종교로 드러나는 것이 이슬람교입니다. 또한 캐톨릭은 엄청난 문화가 있어서 그 속에서 숨을 쉬고 만지고 느낄 수가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모습은 세상 앞에 실제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하는 말만하는 사람들로 세상에 비쳐지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 세상에 구별된 삶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가 그동안 양적인 문제에만, 급급했지, 삶의 변화를 가져 오지 못했기에 지금 사람들은 기독교를 혐오 종교라고 지탄을 합니다.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현장이 없기 때문에 힘없는 종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3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은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자신의 삶으로 기도를 보여 주셨고, 그분은 말씀 말씀하지 않고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그의 삶 전체를 맡기고 살아오셨기에 그분이 간 뒤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정말 책임을 통감하고 이 시대를 다시 복음으로 변화 시키기 위해 스승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희생이 있어야 하고 누구보다 가정과 교회와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도 약3;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선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교사는, 스승은 단지 강단에서 잘 포장된 지식 보따리를 풀어 장사하는 고급 기술자들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세우는 수고의 그 가치를 알고 감당한다면, 이 스승처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아픔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스승의 자리는 외롭고 힘든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 수고에는 값진 열매가 따라 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분명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도, 정의도 거대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채 방황하는 한 복판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스승들이십니다. 삯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일이 없지만 선한 목자는 언제나 그 일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걸고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양 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저주의 형틀에 맡기셨습니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저주하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향해 오히려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위대한 스승은 실수와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줍니다. 끝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요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신앙의 스승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교사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존경받는 영적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스승, 삶으로 본을 보여주는 스승, 그리고 눈물과 사랑으로 헌신하는 스승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찾는 영적 스승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자녀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교회학교 교사들을 통하여 이 시대를 살리는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들이 나올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교사 그들의 삶은 이 시대의 거인의 발자국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