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소박한 시민이 알제리에서 사망했습니다. 31년이 지난 후 미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뉴욕 항에 유해를 실은 군함이 도착할 때 사람들은 그의 유해를 보기 위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환영예포는 뉴욕시가 진동하도록 울려 퍼졌습니다. 그 주인공은 전공을 세운 위대한 장군도 아니요, 노벨상을 받은 인물도 아닙니다. 세계적인 정치가나 예술가나 발명가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온 세상 사람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지은 사람일뿐입니다. 그는 Home, Sweet Home이라는 유명한 노래를 지은 '존 하워드 패인'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내 집뿐이리
아이러니한 것은 존 하워드 패인은 그의 생애에 한번도 가정의 행복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얼마나 가정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마음속에 묘한 푸근함과 향수가 떠오릅니다. 가정의 어떤 것이 푸근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 가정이 화려한 궁궐 같은 집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식탁 위에 산해진미가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은은한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나 쉴 수 있었던 어머니의 품, 지치고 힘들어도 돌아갈 수 있었던 넉넉한 어머니의 가슴, 한없이 울어버릴 마음의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버리고 나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그 어머니의 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안정과 편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기댈 때마다 항상 받쳐주셨고, 폭풍우에 검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길이 막혀도 아버지가 헤쳐 나갔던 그 길 따라 온 식구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시작되고 우리의 인생이 마감되는 그 곳, 가정! 얼굴을 맞대며 싸우고 울던 형제, 자매들, 형제 때문에 야단맞아도 그렇게 밉거나 싫어 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끼며 짜증나고 힘들더라도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기에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맙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기억들과는 다르게,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생각하면 쓰리고 아픈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향수와 푸근함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못했던 어머니, 그렇지 못했던 아버지와 형제들, 원치 않는 가정의 아픔과 다툼과 비극 가운데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따스함과 편안함을 주었던 부모님,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세월의 흐름 앞에 어느새 나의 짐이 되고 있고, 내 아픔과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말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시편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여 있는 것은 시편 120-134편까지 모두 15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성전에 올라가면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것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고,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분문은 가정을 축복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들은 몇 가지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 되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게 1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우리 가정에 주신 가장 큰 복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을 함께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치관이요, 인생관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방향감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들이 신앙이 있고 없고 하면 서로 다른 가치관,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불화의 요소가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주신 가장 큰 복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을 함께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들 속에서 때론 힘든 일도 있었고 때론 고난의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두 번째 감사는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고의 짐이 없던 때가 있었나요? 나에게는 인생의 어떤 수고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고달프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아가며,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괴롭고, 권력자는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짐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연약함과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현대 가정들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지만 고대 히브리 사회의 가정 경제는 남자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남자들이 밭에 나가 땀흘려 일하여 얻는 열매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립니다. 땅은 정직하다고 했습니다.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 병충해가 없으면 농부가 수고한 대로 열매를 거두고 일 년 농사가 잘되면 가족들은 편안하게 일 년을 지냅니다.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이 복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누리는 복입니다. 하늘의 우로를 철 따라 내리게 하시고 재해로부터 막아주시며 침략자들로부터 보호하시는 손길이 있을 때 비로소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가정은 어떤 것입니까? 수입이 많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기의 능력대로 일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손을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수고하면 수고한대로 그 수고에 보람이 있습니다. 횡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대박이 터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서 보람을 가지게 됩니다. 수고의 열매, 이것이 정말 건강한 가정의 모습니다.
세 번째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가정을 주심에 감사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안방’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구석에 있는 방’입니다. 아내가 있는 곳을 구석에 있는 방이라고 표현한 것은 조용히 집안일을 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아내의 모습입니다.
아내를 축복하셔서 결실한 포도나무 같다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관상수나 땔감이나 재목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포도나무는 열매를 바라고 심습니다. 포도열매는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입니다. 포도나무는 밀, 보리같은 곡식과 함께 팔레스틴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동반자입니다. 포도송이가 풍성하게 달린 포도나무처럼 바라보기만 해도 사랑스럽고 기쁨을 주는 아내는 하나님이 남편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한 공간에 살며 쳐다보기도 싫고 말하기도 역겨우며 원수처럼 등지고 사는 부부관계라면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그리고 자식을 ‘어린 감람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린 감람나무는 어린 묘목을 뜻합니다. 어린 묘목은 아무런 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어린 묘목은 비바람이 몰아치면 금방 넘어지고 맙니다. 그렇다고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큰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현재의 모습으로만 본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린 묘목이 많다는 것은 곧 미래 가 밝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많이 써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집안일을 열심히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집안에 일거리를 만들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 - 이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우리나라가 얼마 전까지만해고 이 식탁문화가 일상화가 되었습니다. 한 가족이 한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함께 먹던 추억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대 가족시대에서 핵가족 시대가 되다보니 한 가정 안에서도 서로 다른 식탁을 가지는 모습이 일상화가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가족끼리 단란하게 먹는 식사가 그 가정의 행복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좋은 반찬에 먹느냐 하는 것보다 그 식탁에 얼마나 사랑이 가득하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아주 가깝게 만들어줍니다.
늘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식구(食口)라고 표현합니다. 서로 입을 마주보고 식사를 함께 하는 사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식구들끼리는 모든 허물과 실수도 용납이 됩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나무라지 않고 함께 밥을 먹습니다. 서로의 부끄러운 모습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드러냅니다. 오히려 어떤 모습이든지간에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집안은 든든합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게 밥을 먹고 있을 때 그것을 꼴 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들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으면,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모들의 마음은 든든합니다. 그것만큼 복된 모습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힘들지라도 자식들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맛있게 먹는다면 그것은 부모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들의 손을 잡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 함께 평범하지만 아무 탈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이 더없는 행복이고 축복이었음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식사시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쁜 삶을 산다 하더라도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은 항상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식사 자리에서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유대인의 전통과 예절을 배우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식사자리에서는 아이가 어떤 잘못을 해도 절대로 자녀들을 혼내는 일이 없습니다. 꾸짖을 일이 있으면 식사 이후로 미룹니다. 그들은 식사자리에서 나누는 가족 간의 대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식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식탁을 ‘앨터(Alter)’라고 부릅니다. ‘앨터’는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제단(강단)’을 말합니다.
그들은 식탁을 단순히 ‘밥 먹는 자리’라고만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식사하면서 가족들끼리 삶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삶의 지혜를 나누고,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느끼게 하고, 가족 간의 사랑과 우애에 대해서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행복한 가정은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오늘 여러분의 가정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1절을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4절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성공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까? 하나님 바로 섬기고 부부가 함께 신앙 지키고 자식들이 주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성공이고 행복입니다. 예수 없는 성공, 그 생명이 길지 못합니다. 예수 없는 행복, 물거품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정의 달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관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고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입니다. 아무리 개인이 뛰어난 실력을 가져도 결혼을 잘못하거나, 아이를 잘못 키우면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해 집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교육 수준도 높은 오늘날 불행히도 가정이 급한 속도로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가정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말이 부부이지 남보다 더 대화가 없고 냉랭한 부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대화가 없고 형제간에도 분열과 대립을 일삼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예수 안에서 하나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행복한 가정은 서로의 노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결혼을 합니까?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노력은 하지 않은채 서로 절망하고 낙심하고 책임을 전가시키며 상대방이 변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상대방이 나를 먼저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정원도 가꾸지 않으면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정원도 3개월만 가꾸지 않아 보세요. 온갖 잡초들이 무성하고 사람들이 갖다버린 쓰레기들로 더럽혀지고 맙니다.
우리 교우들과 함께 경남 거제에 있는 외도(外島)를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육지에서 볼 때는 정말 작은 하나의 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여 섬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수많은 나무와 꽃들로 아름다운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쫙 벌리고 감탄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곳에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을 심을 생각을 했을까? 아니 어디서 이런 나무들을 구해왔을까? 정말 아름다운 해상공원이었습니다. 아름답지 않으면 사람들이 왜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구경을 오겠어요? 이곳을 이처럼 아름답게 꾸민 분들은 불모지와 다름이 없는 외딴섬을 피와 땀과 눈물의 노력으로 개간하고 돌을 골라내며 물을 주며 추운 겨울에는 비닐봉지로 감싸주기도하며 나뭇가지를 전지하기도 하며 얼마나 가꾸고 가꾸었겠습니까? 그리고 희귀한 나무를 외국에서 구해오기도 한 정말 수고와 사랑이 빚어져서 만들어진 곳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가정도 가꾸지 않으면 시기와 미움과 증오의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랄 수 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의 노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혼만 했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가족의 행복이 움트고 자라는 요람입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녀들이 바로 자라고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모신 가정이 되게 합시다. 남편이 있느냐 없느냐, 아내가 있느냐 없느냐, 초혼이냐 재혼이냐, 부자냐 가난하냐, 압구정동이냐 자양동이냐 이런 건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 모셨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가정은 가족의 행복이 움트고 자라는 요람입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녀들이 바로 자라고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모신 가정이 되게 합시다. 남편이 있느냐 없느냐, 아내가 있느냐 없느냐, 초혼이냐 재혼이냐, 부자냐 가난하냐, 압구정동이냐 자양동이냐 이런 건 아무 상관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가정을 잘 가꾸시고 우리의 가정을 통해 주의 나라가 아름답게 드러나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5/5일은 여러분의 온 가족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온 교우들이 야외로 나와 예배를 드리고 즐거운 교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교우들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성도의 교제와 서로를 위한 섬김의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평소에 내가 깊이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가까이 하지 못했던 교우들과 좀 더 깊이 있는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 교회를 섬기면서도 서로 얼굴을 모르던 사람도 있고, 가까이 하지 못한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야유회는 마음을 여는 날입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손 내밀어 악수하고, 따뜻한 인사를 나눔으로 더 깊은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다가가는 것이 이웃을 섬기고 사랑 하는 첫걸음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손 내밀지 못하면서 다른 누구를 섬긴들 그 섬김이 진심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운동하고 게임을 하면서 우리의 영혼만큼이나 우리의 몸과 마음도 건강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동성의 영적 가정이 정말 행복하다는 기쁨의 간증이 가득 일어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