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이 위중한 때가 아닙니까? “안보·정치·경제 등 모두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특히 나라를 이끌어 갈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각 정당의 공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실망을 하는지 모릅니다. 국민의 의지와는 아랑곳없이 당리당략에 따라 안하무인 식으로 비쳐지는 모습 앞에 지금 국민이 실망과 분노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문을 읽거나 TV의 뉴스 보도를 들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이 세상을 확 뒤집어 놓을 수 없을까?'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좀 더 신앙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선하고, 좀 더 정직하고,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바꿀 수 없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사모한다면 아마 한두 번씩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됩니까? 얼마나 음란합니까? 얼마나 사치스럽습니까? 얼마나 잔인합니까? 얼마나 포악합니까? 얼마나 불법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이런 현실을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 좀 바꾸어 놓을 수 없을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과 함께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코드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교회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오직 교회만이, 복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저는 한번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앞에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가 지난주에도 보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요20: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밖은 세상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겐 감당치 못할 엄청난 현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실패자들을 ‘보낸다’는 이 말은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어마어마한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갖추어져야 되지 않습니까?
이 명령을 들은 11명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습니까? 또 한 가지 예수님의 명령이 현실성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고후4:4절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흐트려놓아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설령 들었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깨달았다 해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의 모습이 세상 앞에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7절에도 바울은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 질그릇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는 모두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질그릇은 너무도 쉽게 깨집니다. 질그릇의 성분은 흙 속에 여러 가지 물질들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유리 성분도 많이 있고 각종 이물질도 많이 있어서 하나로 단단하게 응집시킬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약한 열로 구웠기 때문에 흙 성분을 완전히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집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강한 것 같지만 쉽게 주저앉고 쉽게 깨지고 맙니다.
여러분에게 해바라기 그림으로도 익숙한 네덜란드의 화가 '반 고흐'가 있습니다. 그는 목사 아들이었습니다. 화가가 되기 전 벨기에의 한 조그만 탄광에서 말씀을 전하며 광부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어느 날 고흐의 눈에 노동자가 입고 있던 옷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만든 옷이었는데, 등 쪽에는 본래 쓰여 있던 문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취급에 주의할 것' 여느 때 같으면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감전이라도 된 듯 한 동안 깊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렇다. 인간이란 정말 깨어지기 쉬운 존재구나. 나는 전도자라고 하지만 얼마나 자주 깨어지는가.‘ 옆에 분들하고 함께 인사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참 깨지기 쉬운 존재가 옆에 계시군요.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한다하지만 범위도 좁고, 깊이도 얕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진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제한되어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것 같지만, 쉽게 절망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존경하던 분에게도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도 넘어지고, 장로도 시험에 듭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도 유혹에 넘어가고, 믿음이 대단하던 이들도 별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흙으로 만들어진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 성군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닮고 싶고 그들의 삶의 모델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기록한 시39:5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윗이 한 60-70년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지금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몇 년이나 될까 손가락을 세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내가 한 생을 살았다고 하는 데 그것이 고작 한 뼘에 불과하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길이를 잴 때 기본 단위는 한 뼘이었습니다.
다윗이 병상에서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 아무것도 아니구나!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굉장한 인생을 산 것 같은데, 나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별 것 아니구나. 한 뼘뿐인 인생,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나 든든하게 서 있는 것 같이 늙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고, 잘못되지도 않을 것 같은 전성기가 있습니다. 그 때가 든든히 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춘을 자랑하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과시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여 명성을 떨칠 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기가 세운 기록이 깨어지는 날이 오고, 명성도 사라지고, 공로도 잊혀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릴 때만해도 가지고 못 가진 것 때문에 또 배우고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얼마나 열등감에 허우적거렸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요즘 여자가 나이가 들면 40대가 되면 그때부터 ‘얼마나 배웠는가?’ 하는 것이 무너지게 되지 않습니까? 소위 학력의 평준화입니다. 또 50대가 되면 ‘얼마나 예쁜가?’ 하는 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인물의 평준화입니다. 아무리 이쁘게 치장하고 꾸며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리고 60-70대가 되면 ‘얼마나 잘 사는가?’ 하는 것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건강의 평준화입니다. 사실 세상에서의 자랑은 그 때뿐입니다. 이처럼 세월 따라 평준화가 되는데 여기에 무슨 희망을 걸겠습니까? 이 덧없는 인생, 너무 미련두지 말고,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좀 감격 있는 삶!!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정말 오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 우리는 다 무슨 존재다. 질그릇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그 질그릇 속에 내용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그릇'과 '보배'를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이 귀중한 보배를 질그릇에 넣지 않습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기 때문에 첫째 보기가 흉합니다. 질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 곳에 부딪혀도 쉽게 금이 가거나 깨집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보물을 못생기고 위험한 질그릇에 담아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7절 후반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금이나 은이나 강철로 만들지 않으시고 흙으로 만드신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이 질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막강한 존재로 만드셨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질그릇임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만들고 '복제 인간'을 만들고 난리를 피우는데 아마 세상은 훨씬 더 무서운 교만의 바벨탑을 쌓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복음 전하는 사도인 바울을 왜 온갖 고난을 다 받게 그냥 두셨을까요? 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질그릇 상태에서 복음 전하도록 그냥 두셨을까요? 천사처럼 초능력이라도 있으면 더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 이유는 자기 힘을 믿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질그릇 상태에서 복음 전하도록 그냥 두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일시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긴 시간표로 볼 때 그것은 일시적인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오히려 세상의 약함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으로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이것을 가장 잘 깨달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강한 자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사울인데 그 의미는 ‘큰 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가장 작은 자임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바꾸어집니다. 바울의 의미는 ‘작은 자’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항상 약한 자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알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참된 가치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보배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안질이나, 말라리아, 간질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 목숨을 걸고 복음 전하는 자에게 이런 가시를 주셨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이 가시를 뽑아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너무나 싸늘합니다. 고후12:9절에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자기의 힘이 강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하나님의 지혜를 등한시 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할수록 부족할수록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찾게 됩니다. 따라서 너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를 뽑으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가시가 너를 찌를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며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너의 약함을 나의 강함으로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응답을 들으면 서운할 법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깊이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아~내가 약할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순간이구나.’ 항상 그는 자신이 질그릇 같은 인생임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릇의 가치는 그 그릇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그릇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으로 만들었어도 거기에 오물을 담는다면 그 그릇은 요강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그릇이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왕의 옥쇄를 담았다면 그 그릇은 옥쇄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심령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우리가 그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함과 동시에 예수의 생명은 바로 우리 심령 속에 담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 생명을 담은 질그릇, 다시 말하면 예수 생명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는 오물보다 더 더러운 세상의 죄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외모가 출중해도, 아무리 그 사람이 배운 것이 많아도, 아무리 그 사람이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해도 하나님 보실 때 요강이나 쓰레기통처럼 보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의 심령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아무리 외모가 추하다고 해도,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형편없는 존재라고 해도 하나님 보실 때는 보배함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치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다른 것들이 담겨져 있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 그 안에 의인 10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의인 10사람 그들이 다른 사람들 수십 수백 만 명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 보실 때 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보배를 내 안에 담가 둔 인생은 더 이상 무력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바울은 그동안 자기가 복음 전하느라고 당한 모든 약함을 네 가지의 고생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 가지 약함과 고생은 반드시 정반대 되는 말과 대조시켜 놓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이 복음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이 복음을 위해 당신의 삶을 던집니다. 이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었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핍박이 파도처럼 밀려 오는 고통도 맛보았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9절 후반부를 보세요.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마어마한 쓰나미 같은 파도가 덮쳐도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버린 바 되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보배로우신 예수, 그 부활의 생명의 주님이 그의 질그릇 같은 인생에 버팀목이 되어 그의 삶을 이끌어 주 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모습니다. 나는 약함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 같은 인생 한 복판에 다가오신 그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더 이상 무기력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역시 이제 내가 복음을 들고 사는 인생으로 세상 앞에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가 깨져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가 없는 인생으로 살 때는 내가 깨지면 한낱 질그릇으로 아무 소망이 없지만,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내가 부서지고 깨지고, 죽어질 때, 내 안에 예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란스 헤브너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깨뜨림의 참된 의미를 얘기하면서 ‘깨뜨림은 85%로 만족할 수가 없다.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한 남편이나 한 아내가 서로를 향해서 ‘여보 내가 당신에게 적어도 85%는 성실할께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와서 ‘여보 내가 전체는 못해도 85%는 당신을 향해서 성실할 께요.’ 그 말은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15%는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만족하시겠어요? 15%가 문제죠. 그 15%때문에 시험이 듭니다. 깨뜨린다는 것은 85% 일수가 없습니다. 깨뜨림은 100%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사랑이란 전체와 전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100%와 100%를 바꾸는 것입니다. 85%와 15%의 결합이 아닙니다. 전체와 전체를 맞바꾸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 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외아들을 주신 사랑.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 더 정확하게 말할까요? 전부예요. 옛날 고대시대에, 옛날 시대에 지금도 그렇지만 외아들을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해서 외아들은 전부입니다. 그의 생명입니다. 그 전체를 주었단 말입니다. 자기 전부를 내어 주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전부를 내어 주었습니다. 십자가에게 피 흘리신 주의 사랑, 그것은 당신의 전부를 완전히 깨뜨려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의 피 흘리심, 그의 내어주심, 그의 몸이 그의 100%가 십자가에서 깨지고 피 흘려 그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여러분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이100%의 사랑에 빚지고 있는 자,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정당한 응답은 어떤 응답이어야 할까요. 100%를 드리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나의 인생을 이처럼 대우하심으로 내가 여기 섰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의 외침처럼 고후서4장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한생을 당당하게 믿음으로 성령을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바울은 죄수로 로마에 끌려 왔지만, 세상은 바울 가슴 속에 담겨있는 생명의 예수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연약한 바울이 전한 그 복음 앞에 세상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음란의 도시 고린도가 무너졌습니다. 쾌락의 도시 에베소가 무너졌습니다. 마침내 유럽이 복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나는 질그릇 같지만, 내 안에 보배인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제 부활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과 이 지역에 다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